설교의 내용과 형식에 비해 설교의 전달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설교문을 작성하면 대개 그것으로 설교준비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설교를 내실 있게 작성하고도 전달능력이 부족해서 회중을 졸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반면 설교 내용은 사실 별게 없는데 설교의 전달 능력이 탁월하여 회중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훈련의 필요성에 대한 어거스틴의 제안은 눈여겨 볼 가치가 있다. “거짓된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는 자들이 자신들의 거짓을 간략하게 분명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말하는데 반해 후자는 듣기에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들고 최종적으로 믿어지지 않게끔 진리를 말해야 한단 말인가?

전자가 청중들을 두렵게 하고 마음을 녹이고 생기 있게 하고 분발하게 하는 그들의 강력한 연설에 의해 청중들의 마음에 그릇된 견해를 고취시키는 반면, 후자는 진리를 수호하는데 있어 게으르고, 정열이 없고 졸리게 할 수 있는가? 악한 자들이 사악하고 가치 없는 경우들의 승리를 얻기 위해 나아가 부정직과 오류를 획득하기 위해 웅변술을 사용한다면, 왜 선한 자들이 진리의 편에 사용하기 위해 그것을 연구하지 않는가?”

확실히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언변의 능력(facultas eloquii)은 설교자들에게 매우 필요한 요소다. 사실 설교는 대중을 상대로 한 종교연설이다. 그렇다면 연설 일반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당장 설교는 말이다. 말이란 맛깔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말의 높낮이, 빠르고 느림, 억양, 이완과 휘몰이, 뉘앙스 살리기 등 말을 잘하기 위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

당장 자연스런 구어체를 바탕으로 사상적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 문어체를 사용하는 것, 단문과 능동태를 통한 설교의 탄력을 확보하면서도 장문을 통해 메시지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 다시 단문을 통해 장문의 내용을 치장해 주는 것에 대해 설교자는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는 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일반 글쓰기가 요구하는 경제성과는 다른 점층과 부연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마이크로 폰이 발달했다 해도 절정의 처리는 훈련된 설교자의 사자후를 필요로 한다. 한 문장 안에서 숨쉬는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이 기계적으로 동일한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률적인 설교의 속도를 지양하되 어느 정도의 변화를 어떻게 주어야 좋을지 스스로의 설교를 녹음 혹은 녹화해서 스스로 확인해 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점검 사항이다.

 이런 사항들을 검토하지 않은 설교 준비는 여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나지 않은 설교를 그대로 가지고 강단에 오를 경우 설교의 진정한 방해자는 바로 설교자 자신일 수 있음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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