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3:4~9)

‘화두’라는 단어는 불가에서 주로 쓰는 단어지만, 차용해서 묵상의 문을 열어 본다.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던진 본질적 화두의 내용은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울인데 나를 뭐라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는 것이냐를 공개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울이 직접 하는 단언이 사역자들 또는 집사들이다. 어떤 사역, 또는 무슨 사역인가 하면 “너희로 하여금 믿게”한 사역자들이라고 한다. 이 사역자들은 분명한 역할 분담을 갖게 된 사역자들이다. 이들은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다. 그 상대적 구분은 분명 차원이 다른 ‘자라게 하시는 이’인 하나님 뿐이시다. 역할 분담이 아닌 능력의 분담이다.

이로써 명확한 구별이 이루어지는데 ‘주’와 ‘종’, 주종관계가 형성된다. ‘종’은 누구에 의해서도 그 어떤 기회나 능력으로도 ‘주’가 될 수 없고, ‘주’로 여김이 되거나 자화자찬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분명하고도 심각하게 “바울은 무엇이냐?” 묻자마자 바울은 ‘사역자’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의 명확한 대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한편이 있다. 매트릭스라는 영화인데, 수열로 프로그램 된 가상현실의 영화다. 프로그램 된 여자 예언자를 만나러 간 주인공 앞에 염력을 사용할 줄 아는 한 소년이 손에 숟가락을 들고 휘어지게 하는 것을 본다. 신기해 하는 주인공에게 소년이 숟가락을 하나 내밀며 하는 말이 이 묵상의 결론을 보충해 준다. “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진실을 인식하면 된다”라고 말을 한다.

영화에서는 ‘그’라는 인물을 만들어내는데 프로그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휘게 만드는 자가 아니라, 진실을 인식하면 그가 바로 ‘그’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하게 된 갈등의 화두에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이냐?”할 때,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바울이 무엇인지 진실을 인식한 고백을 한다.

‘주’와 ‘종’의 완전하고 은혜로운 관계는 주와 종의 진실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라게 하신다. 십자가의 도(1:18)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그리스도(1:24)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는 내 말과 내 전도함(2:4)이 하나님의 능력이라 선포한다.

아볼로나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를 심고 물을 줄 뿐이다. 아볼로나 바울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를 심거나 물을 줄 뿐이다. 아볼로나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나타나심과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말과 전도함으로 심거나 물을 주는 것뿐이다.

‘주’와 ‘종’은 이러하기에 종인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동역자, 사역자, 또는 집사들일 뿐이다. 종이며 사역자들 앞에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바울이 집주인이거나 집 자체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주신 바대로 해야 할 일이 규정된 맡김을 받은 종이다.

고린도교회가 분파로 나뉘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길은 진실을 인식하여 도리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인식한 진실은 오롯이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믿게 하는 사역자일 뿐이다. 오늘 바울이 우리 목회자와 성도들의 자기 인식에 도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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