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이신 어느 사모님께서 책을 한 권 보내 주셨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 
‘애오개’를 이렇게 쓸 수는 없느냐는 채찍인지 아니면 애오개가 관심을 기울였으면 하는 영역을 더 많이 넓힐 수는 없는가 하고 묻기 위한 의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림 에세이를 보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부끄러웠다. 자신의 삶이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불만과 불평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지(신명기 8장)” 못하면서도 무슨 하나님의 종이냐고 들이대는 것 같아 그냥 두 손을 들었다.

▨… 이번 호 애오개의 서두가 조금 장황하더라도 구작가의 경력을 외면치 마시기를 부탁드린다. 두 살 때 열병을 앓고 소리(청력)를 잃은 그녀는 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년 전 시력까지 잃게 되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이제 소리에 빛까지 사라지는 세상에 맞서야 한다. 그래도 그녀는 슬프지 않다고 한다. “저는 하나님께 꾸밈없이 살고 싶어요.” 이렇게 기도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어떤 분이 구작가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그녀의 대답은 어리둥절할 만큼 단순하고 명료했다. “지금의 내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다.” 내친 걸음이라는 것일까. 질문하는 분이 조금 냉혹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일분 후에 시력을 잃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엄마에게 ‘카카오톡’을 보내겠다.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더 잘 부탁해.” 어머니와 딸의 사이가 군더더기 없이 명확해지는 대화 아닌가.

▨…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엉뚱한 요청에 대해 예수께서는 물으셨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야고보와 요한이 망설임없이 답하였다. “할 수 있나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나의 마시는 잔’과 ‘나의 받는 세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함을 꾸짖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을 담담히 밝히셨다.

▨… 어머니께 감사하는 딸의 마음이라면 제117년차 총회의 구호 ‘한 성도 한 영혼 주께로’를 이룩해낼 수 있을까. 야고보와 요한이 그 의미도 모른 채 감당할 수 있다고 욕심부렸던 예수님의 잔과 세례를 통해서라야만 제117년차 총회의 구호는 이뤄낼 수 있다. 정직하게 점검하자. 십자가의 죽음은 정직한 증언으로만 전파되는 신비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