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헌은 구리개전도관에서 체험한 은혜를 연동교회 신자들에게 간증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연동교회 내에서 논란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이명헌 조사와 원세성 집사는 경신중학교에 다니던 배동석 학생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했다.

이에 관하여 이명직 목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후에 회개한 배동석의 고백을 토대로 하고 있다.

“김상준 목사가 동경 성서학원에서 졸업하고 처음으로 경성에 건너와서 구리개(銅峴)에 다가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복음전도관)를 설립하고 전도하는 중에, 성신의 큰 부흥이 일어나서 각 교회 교역자와 신자들이 많이 참석할 때, 연동교회 조사 이명헌 씨와 집사 원세성 씨도 참여하여 큰 은혜를 받아서 가서 간증하는 중에, 그 교회에서도 또한 많은 신자가 은혜를 받아 회개하며 자복하게 되었다. 이때 애국심이 팽창한 배동석 군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배 군은 큰 감정을 품고 생각하기를, 종교는 국가를 문명케 하고 사회를 개량하며 애국심을 배양하는 것이거늘, 저 동양선교회는 국가와 사회를 해롭게 하고 사람을 미신으로 인도하니, 마땅히 폭발탄을 던져서 파멸케 하고 또한 그 미신에 침혹(沈惑)된 원세성, 이명헌 두 사람은 암살하리라고 작정하였다.”

흔히 목격하듯이, 여기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종교의 역할에 대한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본주의자들 혹은 민족주의자들은 종교의 역할이 국가의 문명화, 사회의 개량, 애국심의 고취 등과 같은 외적인 공헌과 성취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본주의자들은 종교의 역할이 개개인의 내적인 변화에 중점을 두며, 사회적 공헌과 성취는 내적인 변화에 수반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 신본주의자들과 인본주의자들 간의 갈등이 있다. 이것은 구리개전도관의 부흥운동으로 일어났던 초기 복음전도관의 수난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서울의 중요한 교회들은 망국으로 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구국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 교회들에는 상당수의 기독교 민족주의자가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의 전통적 유교 관료주의가 거칠고 소란스러운 대부흥 운동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국교회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이 대부흥 운동의 바람도 게일과 연동교회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깨뜨리는 부흥 운동이 구리개전도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자 한 말의 대표적 민족주의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가 네 차례의 사설을 통해 복음전도관을 친일적이며, 미신적인 종교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이런 논란의 와중에, 이명헌 조사와 배선표 집사 등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으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그들이 연동교회를 떠난 데는 당시 장로선거와 관련된 신분 문제로 야기된 연동교회와 묘동교회의 분열 상황도 일조했던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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