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설교에 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순히 성경구절을 주석하듯이 풀이하는 것 혹은 특정 주제에 맞춰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설명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표적인 현대설교학자 토마스 롱은 성경적 설교는 설교할 때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느냐와 상관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토론토대학에서 설교학을 가르친 폴 스캇 윌슨은 아무리 많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설교라 하더라도 성경적이지 않은 설교일 수 있고 본문을 전혀 인용하지 않아도 성경적인 설교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예로 이단들의 설교를 보면 수십 구절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설교하지만 그들의 설교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성경적 설교의 요체인가? 토마스 롱은 성경적 설교는 설교에 참여하는 이들의 현재적 경험과 관련하여 얼마나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성경적 설교의 문제는 곧 해석의 문제이다. 누군가 자신의 해석이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고자 할 때 그 해석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거나 그 해석이 성경가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해석을 “성경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청중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당한 해석과 설교자가 전달하는 본문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 충돌하느냐 일치하느냐에 따라 설교가 성경적이다 혹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는 지배적인 해석을 다수가 공인하기보다는 개별 해석의 다양성 혹은 해석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이기 때문에 성경적 설교를 위한 해석학적인 기준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도 이전 같으면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일 만한 전통적인 해석임에도 부당한 해석으로 거부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는 본문을 전통적인 설교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그렇게 적혀 있으니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라는 방식으로 전달했다. 그것이 전통적인 해석에 근거한 성경적 설교였다. 그러나 요즘 교회들에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단순하게 설교하면 설교자가 가부장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본문의 맥락을 살피지 못하고 비성경적 설교를 전한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롱이 말한 바와 같이 성경에 대한 해석이 현재적 경험과 큰 괴리를 보일 때 그것을 정당한 해석에 근거한 성경적 설교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교회에서도 전통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이 주류인 공동체는 여전히 그것이 성경적인 설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학적인 상대성의 시대에 성경적인 설교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간명한 대답은 설교자의 성경 해석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설교의 논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의 문법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트는 계시의 연속성 혹은 합계시성이라고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계시의 초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설교를 하려면 개별 성구의 의미를 올바르게 주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계시의 초점이자 성경의 해석학적인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출 때 설교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견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적 설교란 곧 복음적 설교이며 그리스도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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