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험은 부모의 곁을 떠나 먼 곳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도 그의 믿음을 지켜주었다. 온갖 시련과 유혹의 폭풍우 속에서도 그를 붙잡아주는 영혼의 닻이 되었다. 15세 여름방학 때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철도 전신기사가 그의 직업이 되었다.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시카고로 전근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적 성공과 함께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다. 주일이 되면 그는 습관을 좇아 교회로 갔다. 그런데 대도시의 집회는 소박한 마을회관의 집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찬양과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낯설게만 느껴졌고, 이전에 친근했던 교회 사람들과 친구들의 따뜻한 태도가 그리웠다. 어릴 적 그의 마음에 새겨진 교회의 흥미로움을 찾을 수 없었고, 부모의 체취를 그리워하는 향수 또한 달랠 길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일에도 사무실 책상을 지키는 일이 잦아졌고, 교회는 뒷전이 되었다. 곧 그의 영혼은 냉담해졌고, 내면을 울리던 하나님의 음성도 점차 사라져버렸다. 

젊음의 때를 타락의 길로 이끌고자 하는 유혹이 그의 삶에도 찾아왔다. 도시는 거리마다 유혹의 손짓으로 가득했고 동료들도 그를 금지된 길로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훈련과 체험, 경건한 부모의 모범과 기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자비가 그를 무너짐과 망가짐에서 건져주었다. 일순간의 육감적 쾌락을 위해 술과 방탕으로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동료들을 반면교사로 삼고, 그런 길에서 멀어지고자 애썼다. 신앙의 불꽃에는 힘이 없었지만 도덕의 길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결코 죄로 더렵혀지지 않은 한 가문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시험의 시간에도 그를 견고하게 붙잡아 주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죄악의 유혹에서 그를 지키고 믿음의 자리로 이끌려는 하나님의 개입은 멈추지 않았다. 19세 때, 그는 서부연합전신회사(The Western Union Telegraphy)의 사무실 책임자로 이직했다. 회사는 로키산맥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온천으로 유명한 콜로라도 글렌우도 스프링즈에 있었다. 대자연의 신비와 싱그러움이 대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대신하는 곳이었다. 2년 후(1889) 찰스는 6년 간 달달한 사랑을 나누던 두 살 연하의 레티(Lettie Burd Cowman, 1870-1960)와 결혼했고, 깨볶는 향기가 그치지 않는 행복을 누렸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안락한 행복의 둥지를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레티가 심장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일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행복한 자의 불행과 불안이 그들을 엄습했다. 하루는 의사가 황급히 왕진을 왔고 그녀의 가느다란 맥박을 살피는 동안, 찰스는 그 곁에 무릎을 끓고 간절히 기도했다. “오, 주님! 아내의 삶을 연장시켜 주옵소서. 어렸을 적 기도했던 그 소년을 기억해 주옵소서!” 생사의 경계는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행복이 아니었다. 오직 생명의 주님께 달린 일이었다. 이 진리를 알았기에 찰스는 어릴 적 기억을 붙잡고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열납하시고 레티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다. 결국, 레티의 병 때문에 찰스는 다시 시카고 전신사무소로 옮겨 뉴욕지사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찰스의 걸음은 여전히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고, 그 일은 1891년까지 계속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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