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월남하여 탄광촌교회 개척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폭격함으로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은 해가 갈수록 격렬해졌고 일본은 군인과 군수물자 조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21세 된 청년들을 징집대상으로 전쟁에 내몰았다. 특히 대학에 재학 중인 조선의 학생들은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자원입대를 독려했고, 21세가 되면 징집영장이 나와 자동 입대하여 훈련 후, 남양군도나 중국영토에 배치되어 전쟁을 해야만 했다.

1944년 임용희는 징집연령에 해당되었지만, 다행히 그의 근무지가 일본의 국가기간 산업의 하나인 발전소 근무였기 때문에 특혜로 징집이 면제되었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직장과 교회생활을 충실하여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그는 신의주의 직장에서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소련군들이 해방군의 자격으로 북한 전역으로 밀려들어 왔고, 김일성은 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북한 전역을 장악했다. 이후 김일성은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는 모두 국가 소유로 하였으며 지주들의 토지는 빼앗았다. 그 해 11월에 신의주 학생 5천명의 반공시위가 일어나자, 소련군은 무차별 총격을 하여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죽고, 1천여 명이 부상하였다.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를 싫어했다.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구실로 평양의 숭실학교와 기독교 학교를 폐쇄시키고, 근로동원을 만들어 주일 오전에 소집하여 예배 때문에 불참한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함으로 노골적으로 교회 박해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북한의 교역자와 제직이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 둘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임용희는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느껴, 1947년 5월에 3년 후에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부모를 떠나 그의 내외가 아들 하나씩을 등에 업고 황해도 해주를 거쳐 서울로 어렵게 들어왔다. 그리고 매제가 살던 용산 서계동 작은 방에 피난의 짐을 풀었다.

그는 얼마 후, 고향 친지를 만나 함께 강원도 삼척탄광회사의 서무직원으로 일하면서, 여럿이 힘을 모아 장성중앙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집사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는 막장인생 광부들의 영혼구원에 소중한 사명을 느꼈다. 그래서 탄광촌교회를 건축할 때 결정적으로 공헌을 했다. 당시 장성중앙교회가 임시 예배를 드리는 대지는 국가의 상공부 소유지여서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는 간절히 기도한 후, 당시 상공부장관에게 간절한 탄원서를 써서 보냈다. 건축부지가 국가 상공부 소유지인데, 이곳에 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간청의 글이었다. 당시 상공부장관 윤보선 씨가 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아 부지사용을 허락하였을 뿐 아니라, 요청하지도 않은 건축용 목재 2만재와 시멘트 300포까지 장성중앙교회에 기증하라고 결재하여, 가난한 탄광촌교회가 1949년 가을에 70평의 교회건축을 거뜬히 완공할 수 있었다.

이런 역사는 물론 당시 상공부 장관 윤보선 씨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편지글 때문이기도 했다. 소년시절부터 꾸준히 배우고 가꾼 문장력에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역사가 더하여서 이루어진 쾌거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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