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섬’일군 순교신앙 , 문준경 전도사 헌신과 이판일 장로 순수신앙

천국의 섬 ‘증도’

▲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와 기념탑은 천국의 섬 증도를 느끼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증도는 신안군 섬들 중에서 큰 섬은 아니다. 그러나 관광지로서 볼거리가 풍부하고 체험과 쉼이 어우러진 곳이란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대의 소금생산지인 태평염전과 소금박물관, 드넓게 펼쳐진 갯벌과 갯벌 위에 세워진 짱뚱어 다리, 송원대 유물선이 발견된 바다와 이를 내려다보며 낙조를 즐길 수 있는 정자, 쉬어가는 휴양지로 개발된 엘도라도 리조트….

한편으로 증도는 섬 주민의 90% 이상이 그리스도인인 ‘천국의 섬’이라으로 불린다. 그것도 대다수가 성결교회 교인으로 신앙생활을 일구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홀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다가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를 만나게 된다.

신안군 자은면 도창리 출신인 문준경 전도사는 17세 때 증도로 시집을 온다. 하지만 남편의 바람끼로 버림받고 홀로 생활해야 했다. 외로움과 고통은 그를 신앙으로 더 이끌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작한 경성성서학원 생활은 문 전도사를 신앙으로 강하게 했고 방학기간인 1930년에 임자도에 그의 첫 개척지로 진리교회를 세웠으며 이듬해 증도에 교회를 세웠다.

이들 교회와 대초리와 우전리 등에 기도소를 세운 그녀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이면 동네 어귀 언덕에 올라 ‘허사가’와 ‘천당가’, ‘예수 사랑하심은’ 등의 찬송을 불렀다. 목소리가 크고 목청이 좋아 어린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문 전도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때론 노두를 건너고 배에 몸을 싣고 바람에 의지해 인근 섬을 오갔다. 얼마나 열심을 다해 걸었던지 일 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가 헤질 정도였다.

그렇게 헌신하기를 20여년,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소란스럽던 증동리 해변 모래사장에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죄 많은 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작지만 또렷한 외침이 울렸다. 공산당원들의 총칼 아래서 문준경 전도사가 마지막 음성을 외쳤다. 그렇게 문 전도사는 성도들의 곁을 떠났다.

문 전도사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한국교회와 성결교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만신 김준곤 정태기 목사를 비롯해 이봉성 이만성 목사 등 증도와 임자를 포함해 목회자만도 50여명이 넘는다. 또한 그의 신앙의 힘은 신안군 모든 읍면에 영향을 미쳐 14개 읍면에 100여개 성결교회가 세워졌다. 그 분이 있었기에 신안군은 성결교회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들이 그 분의 신앙을 따르고 있다.

섬에 도착해 증동리교회를 지나 순교지를 찾았다. 해질녘 붉은 태양이 비추는 순교 기념지는 조용했다. 그분의 신앙의 흔적이 적힌 기념비를 쓰다듬는다. 글귀조차 지워진 옛 순교비는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 전도사님이 누워 계시다’는 글귀 앞에 숙연해 진다. 시골 할머니 같은 문 전도사의 얼굴은 성결인에게 자상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 교단은 지난해 교단 차원에서 순교 기념관을 건립키로 하였으며 500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본격적인 건립 추진에 나섰다. 성결교회의 순교기념관이 문 전도사의 신앙 터전에 건립하려는 것은 그만큼 문 전도사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임자 진리교회

▲ 이판일 장로 등 48명을 기념하는 순교탑이 진리교회와 어우러져 그들의 신앙의 굳건함을 오늘에 전달하고 있다.
임자 진리교회 또한 문준경 전도사의 헌신적인 신앙이 배어있는 곳이다. 그녀가 최초로 세운 교회가 임자 진리교회이고 그에 의해 신앙을 배우고 익힌 이판일 장로와 성도들이 순교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문 전도사의 신앙의 동역자인 이판일 장로는 문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처음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얼마나 결심이 굳었던지 가지고 있던 담배쌈지와 담뱃대를 부엌 아궁이에 던져 넣는 결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자기 집 땔나무 보다 교회 사택의 땔 나무를 우선했고 자기 집 물독보다 교회와 목회자 사택의 물독을 먼저 채웠다. 주일에는 주일성수를 중요시 여겨 농사일이 있어도 하지 않았으며 술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오늘을 사는 성도의 신앙 자세를 다시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한 신앙이 있어 성도들이 늘고 1933년에 목조 초가집으로 교회를 신축해 진리교회의 간판을 내걸게 된다.

10월 4일 밤,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 외 일가족 13명 그리고 성도들은 함께 예배를 드리던 도중 공산세력에 의해 모두 연행되었고 다음날 새벽 마을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진 솔밭에서 순교를 당했다. 그들은 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48명 성도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판일 장로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죽겠다고 하고 “이 악한 사람들을 예수의 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예수님처럼, 그의 신앙의 사부인 문준경 전도사처럼, 이판일 장로도 그렇게 이들의 신앙을 따른 것이다.

이판일 장로의 순교는 평신도 지도자로 교회를 지키다 순교한 몇 안되는 사례다. 그의 신앙은 아들인 이인재 목사에게, 그리고 손자인 이성관 목사(여주교회) 등에게 이어졌고 이 장로의 신앙의 터전 위에 7개 교회가 세워져 하나님의 사역을 펼치고 이다.

임자도 선착장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임자 진리교회는 순교기념교회다.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는 땅과 연하여 나지막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무에 가려진 교회 앞마당에는 1957년에 지방회에서 세운 순교기념비와 1990년 총회에서 세운 기념비, 그리고 교회의 십자가 탑이 교회 건물과 어우러져 서있다. 손으로 더듬어 읽어 내려가야 하는 옛 순교기념비와 한 귀퉁이 떨어진 조각이 안쓰러운 순교기념탑의 모습에서 오늘의 순교 신앙의 한 단면을 느끼게 한다.

손으로 48명의 이름을 되뇌이며 섬을 나선다. 오늘 순교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물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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