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수양관으로 목사님을 찾아가 뵐 수 있었다. 평생을 목회하시고 은퇴하신 후에도 왕성하게 일하시는 노 목사님을 가까이서 뵐 수 있는 건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 모른다.

목회지에선 늘 긴장하며 지내다가 노 목사님 앞에 가면 나도 모르게 완전 무장해제가 되어 가끔 하나님께만 해야 할 넋두리를 해대곤 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해답을 노 목사님께 얻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그 특유의 사투리로 한마디면 그만이시다. “기도 하라우!”

교단법에 따라 목사안수 받은 지 두 해째지만 아직도 목사라는 말은 내게 어색하다. 더구나 아직은 희귀한 여자 목사라는 직함은 이 농촌 마을에, 그것도 집성촌을 형성하고 살면서 이 마을은 교회가 안 된다고 하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노인들에게 5년 전 그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을 복판에 보란 듯이 예배당을 세운 머리도 안올린 처녀목사가 쌀 속의 뉘처럼 불편 한 듯하다.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도 다양하다. 그들이 아직 우리 교인이 아닌 이상 어떻게 부르든 상관치 않는다. 논길에서 자주 만나는 팔순의 할아버지는 인사 할 때 마다 누구냐고 묻는다. “황토방 교회 목삽니다.” 그러면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우시며 반가워하시는데 우리 교회 집사님에게 어느 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신이 황토방교회 교주를 자주 만난다고…. 그분에겐 내가 어마어마한 교주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고 있느냐는 것이다. 겉으로만 굽신 거리고 속으로는 목에다 힘주는 그런 가짜 겸손이 아닌 진정 겸손한 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계시는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목사님으로 때로는 아줌마로 자기 맘대로 부르는 옆집 할머니나 동네 사람처럼이 아니라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 난세에 주의 일에 고군분투 하는 나와 이 시대의 주의 종들을 정말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인정하시면 더 바랄게 무엇이 있겠는가!

몇 주 전 주일 날이다.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우리 교회 마당에다 옆집 영감님이 자기네 벼를 베어서 쭉 늘어놓았다. 오후 예배 전에 그런 것 같았다. 예배 마치고 나가는 승용차 한 대가 있었지만 굳이 그 많은 벼를 치워 달라 하기도 불편할 것 같아서 옆으로 살살 피해 나가라고 당부했다.

벼를 피해가느라 자동차 바퀴가 옆 화단 시멘트 모서리에 긁히는 피해까지 감수하며 갔는데 며칠 후 오히려 그  볏단을 치우고 나가지 않아 낱알들이 떨어졌다고 시비다. 볏단을 치워 달라 말하기가 야박한 것 같았고 언제 그 많은 걸 치우냐고 웃으며 말했더니 우리더러 그것을 치우고 나가면 안 되느냐고, 농부의 마음을 모른다고 도리어 큰소리치면서 그 낱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목사에게 일장 훈시까지 한 후 마지막 결정타까지  한마디를 날렸다.

목사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그냥 미안하다고 하면 될 말을 그렇게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생트집까지는 참아주겠는데 목사가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말은 너무 억울해서 노 목사님께 기어이 쏟아놓고 말았다. 역전의 용사 목사님은 그 말씀을 다 들으시고 웃으셨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라고 당부하셨다. “목사는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평소 온유하신 목사님 입에서 나온 너무 가혹한 표현에 잠깐 당혹해 하고 있는 내게 목사님의 부연설명 한마디가 세차게 가슴을 쳤다. 목사는 하나님께 빌어(기도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억울한 그 일도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노 목사님의 목회비결을 어렴풋이 터득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모른다.

이유도 많고 불평도 많은 이 어설픈 목사에게 던지신 노 목사님의 따끔한 일격에는 수 천 수 만 마디의 어휘가 함축되고 생략되어 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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