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강사로 활동하다 서울중앙교회 부임

그의 40일 금식기도 소식이 퍼지자, 그는 초교파적으로 부흥회 강사로 초청되기 시작했다. 그는 큰 교회 작은 교회 가리지 않고 초청 순서대로 가서 열심히 외치고 가르쳤다. 그래서 신자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체험하므로 교회가 변화되고 새로워졌는데, 부흥회의 주제는 중생과 성결이 핵심이었다.

필자가 부평신촌교회 부목사로 청빙되어 간 1967년에는 한달에 4번 이상 거의 매주 마다 초청 받아 전국을 누비는 부흥회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1971년 5월에 그는 성결교회 모교회인 서울 무교동중앙교회 황성택 목사의 요청으로 창립 64년 기념부흥회를 인도했다. 큰 은혜가 임하여 신자들의 회개가 터지고 새로운 은혜체험이 속출했다. 은혜 받은 신자들이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통해 복을 받겠다고 스스로 서원했다. 마침내 1973년 서울무교동중앙교회 황성택 목사가 73세로 은퇴하면서 이만신 목사를 후임으로 선택했다.

당시 무교동중앙교회는 예성에 속했다가 중립으로 있는 처지였지만, 그는 큰 뜻을 품고 승낙하고 1974년 신년 첫 주일에 무교동중앙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무교동중앙교회에는 3개의 간판이 걸려있었다. 무교동중앙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 예수교성결교회 총회본부였다. 교회의 재산문제로 서로 법정싸움을 시작한지 12년째였다.

그는 중앙교회가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할 문제는 법정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는 전임지에서 받은 퇴직금 전액을 당회에 내 놓고. 이 돈으로 먼저 예성본부의 사무실을 얻도록 내 보내고, 기성총회에 고소를 취하하고 합동하므로 교회의 평화를 찾자고 말했다. 당회가 만장일치 결의하여 예성총회가 사무실을 따로 얻어 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기성총회에 합동의사를 밝히자, 기성에서도 환영하면서 고소취하를 하겠다고 약속한 후, 그해 5월 5일 오후 3시에 중앙교회 합동예배를 드리도록 합의했다. 이 소식에 중앙교회 신자들이 거의 찬성하고 기뻐했다. 그러나 정작 그 시간이 되자, 신자 중 합동을 반대하는 파들이 청년들을 선동해 교회 대문을 굳게 잠그고 위협하므로 합동예배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저들을 계속 외면하자, 저들이 할 수 없이 분리해 나가 따로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는 오랜만에 안정과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실로 12년 간이나 지속된 교단 간의 수치스런 법정 다툼을 일시에 해결한 그의 공로를 우리 성결인들은 잊지 못할 것이다.

새 교회당 이전과 건축의 비전
한국교회사상 대부흥의 시기는 1970년대였다. 1973년 ‘빌리 그래함 대전도대회’를 기점으로 이듬해 ‘엑스플로 74’대회, ‘77민족대성회’ 등으로 이어져 거의 1백만 명에 육박하는 신앙인들이 모이는 등 한국교회의 발전은 세계의 빅 뉴스였다.

처음 빌리그래함 집회 이후, 이런 대형집회의 주강사는 한국의 일류 부흥강사들이 수고했는데, 이 강사 중의 한 명이 한국부흥협의회 제5대 회장인 이만신 목사였다. 전도대성회의 열기에 힘입어 참석한 신자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고, 대회 때마다 수만, 수십만의 새 신자들이 결심하고 등록하는 등 한국교회에는 폭발적인 대성장의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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