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기회를 힘입어 중앙교회는 1975년 10월 26일 ‘교인 1,000명 주일예배 돌파’행사를 거행, 성공하므로 대교회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주일마다 좁은 교회당은 북새통이어서 교회의 증축문제가 당회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만신 목사는 기도 중 기왕이면 무교동을 벗어나 새로운 개발지역인 강남으로 교회를 이전할 것을 검토했다. 그래서 당회에서 의논한 결과 현 무교동 대지 매도를 전제로, 2가지 안을 확정했다.

1안은 강남 개발지역의 대지를 매입하고 이전 신축한다, 2안은 1안이 성사하지 못할 경우 강북 4대문 안에 대지를 매입하고 신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축준비위원들이 강남에 가서 여기저기를 탐색했으나 대지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하기 어려웠다. 당회는 할 수 없이 1안을 철회하고, 2안을 추진키로 했다. 그 결과 현 중앙교회 대지(종로 6가 11-1, 773평)를 매입키로 결의한 후, 금액은 무교동 대지를 매도한 금액 중 기성총회와의 합의에 따른 1/3을 헌납하고, 남은 금액(3억 4,000만 원) 전액으로 처리했다.

이제 건축이 문제였다. 이만신 목사는 솔선수범하여 인천 부평의 집을 매도한 금액 5,000만 원과 그동안 모은 금붙이 등을 몽땅 건축헌금에 쾌척했다. 이런 소식에 교인들은 물론 유치부 어린이까지 감동 받아 돼지저금통을 털어 바쳐 목표액 4억 원을 마련하므로 건축은 급물살을 탔다.

교회는 임시 예배처소로 청산여상 강당을 임대하고, 계속 건축공사를 진행하여 마침내 1980년 11월 16일에 감격스런 봉헌예배를 드렸다. 봉헌된 교회 대지는 총 약 4,297㎡(1,300평), 6층 연건평 약 5.140㎡(1,555평)으로 부채꼴로 설계되어 2,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이었다. 이 웅장한 새 교회당은 그 후, 1984년 제39회 교단 총회의 장소로 제공되었다.

공부하는 목회자 상의 표본
이만신은 공부하는 목사였고, 부흥사였다. 당시 한국의 일류 부흥사로서 그처럼 학력이 화려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서울신학교 4년을 마친 후 숭실대학 철학과에 학사편입하여 1963년에 학위를 취득했다.

또 1973년에 건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부흥회 일정 때문에 월요일에 몰아서 강의를 듣고, 수시로 틈을 내어 철학서적을 읽고 공부해 1975년 2월 문학석사 학위(M.A)를 획득했다.

또 초교파신학교인 아시아연합신학대학이 미국 풀러신학대학과의 공동학위 목회학박사 과정을 한국 최초로 개설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1기생으로 입학했는데, 그때가 1979년이었다.

그는 부흥강사라서 수강에 많은 지장이 있었지만 석사과정 때처럼 월요일에 수업을 집중 배정 받았으며, 집회에 가면서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고 쓰고, 리포트와 논문을 작성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2년 간 보냈다.

이만신 목사는 그렇게 억척스럽게 공부해 1983년 2월 목회학박사 학위(D. Min)를 취득했다. 그의 학위 논문제목은 ‘기독교 부흥운동의 역사적 고찰과 한국교회 성장에 끼친 영향’이었다.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했던 이 목사의 노력의 결과는 그의 저서 ‘성결한 생활’, ‘성공한 인생’, ‘마태복음 강해설교 상, 중, 하’, 에베소서 강해설교‘, ’교회성장과 부흥회‘ 등 11권의 역작으로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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