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교단 제39회 총회장 당선과 활동영역 확대
1984년 4월 24일 교단 총회가 개회되어, 총회장 투표에서 이만신 목사가 제2차 투표를 통해 총회장 당선이 확정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55세로, 패기가 왕성한 시기였다. 마침 그때가 기독교 100주년 기념의 해였기 때문에, 성결교회 총회장으로 초교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총회적으로는 그가 소견발표 때 제시한 ‘해외장학위원회’를 교육국에 설치하여 1차로 유학생 20명에게 연 1,000달러를 지불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40명에 연 3,000달러를 지불하여 우리 교단에 해외유학파 교수와 연구하는 목회자의 붐을 일게 하므로 질적인 교단성장에 일조했다. 또 농어촌교회 교역자의 자녀 학비보조를 선교국에서 추진하여 현재까지 해마다 계속되고 있으며, 임기 중 48개 교회가 개척되었다.

그의 대외적 활동은 먼저 그 해 4월에 개최한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 기념대회에서 부흥사 대표 및 교계 대표로 설교했으며, 또 그 해 9월에 개최하는 장로교 총회(통합, 합동, 개혁, 대신 등)를 교단 대표로 참석하여 축하했다. 이후 교단 총회에 각 교단 총회장을 초청하는 등 교단 간 교류를 시작했다. 또한 1985년 3월 부활절새벽연합예배의 대회장으로 행사를 주관했으며, 이듬해는 설교자로 크게 활동하는 등 성결교회의 위상을 한층 강화했다.

 간추린 경력과 큰 수상 두 가지
그는 1974년 중앙교회로 부임한 후,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듯 교단에서나 초교파적으로나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고 직책도 더욱 화려해졌다. 그 중 몇 개만 간추려 본다.

한국기독교부흥협의회 회장(1774),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39회 총회장(1984), 서울중앙신학교 설립 교장(1987-1998), 서울신학대학교 이사장(1990-1992), 세계한민족복음화협의회 총재(1991-1999),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2000-2002) 등이다.

수상 경력은 한국 목회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한국교회사학회 ‘한국교회 10대 설교가’로 선정(1996), 한국 국민으로서 최고 명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2002)이 대표적이다.

원로목사 추대와 소천
이만신 목사는 1999년 12월 만 70세에 정년을 맞아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그는 1963년 40일 금식기도를 통해 영력을 얻어 시작한 목회와 부흥회 강사로 38년 간 사역했다. 국내교회 집회만 약 1,400여 회였고, 해외 집회만도 100회에 근접하는 등 능력 있는 부흥강사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그는 한국교회의 무디로 존경받는 고 이성봉 목사의 뒤를 잇는 부흥사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어, 누구보다 성결의식이 강한 부흥사였다.

그가 은퇴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제7대 대표회장으로 선임되어, 21세기가 시작되는 벽두인 2000년 1월 28일에 대표회장에 취임했다. 회장임기 2년 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크게 노력했는데, 그의 큰 업적은 한국기독교연합회관 13층을 매입한 것이다.

임기를 마친 후, 그는 여러 교회의 초청 받아 일일부흥회 등 성결에 대한 설교로 바쁘게 지내다 2015년 2월 17일 87세를 수한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유족으로는 3남매(현명, 현정, 현미)를 위시해 증손자까지 모두 14명이 신앙의 아름다운 가문을 잇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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