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영 목사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은혜는 있는데 신비가 없다. 그나마 교단이 111년이나 지나면서 은혜도 예전만 못하다. 그래서 은혜를 더 불일듯 하기 위해 불을 더 세게 지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한다. 어떨때는 지나치게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하나님 생각은 못할 때도 있다.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신데,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임을 잊어버린 것이다.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면서 예배에 은혜도 있고 신비도 있는 예배를 드릴 수는 없는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일관성은 있는데 다양성은 없다. 주일낮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 수요집회, 그리고 금요기도회까지 모두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순서나 요소에 별 차이가 없다. 설교 앞 뒤로 찬양을 몇 번 더 하는가, 기도를 얼마나 오래 하는가, 기도를 대표기도로 하는가, 통성기도로 하는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에는 차이가 없다.

주일낮예배는 경건하고 엄숙하게 드리고, 주일오후에는 믿음의 선조들처럼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는 성별회로, 주일저녁에는 중생의 은혜를 구하는 구령회로, 수요집회와 금요기도회까지 활용해서 제자훈련과 영성훈련 방식의 다양한 예배로 드리면 안되는 것인가? 다양한 세상에서 일관성만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는 염곡동 노상에서 북을 치며 사중복음을 외치면, 그 복음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드리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지난 100년간 우리 교단을 이끌어 주었던 고마운 예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40년 남짓 목회하는 우리는 이 예배에 익숙하다.

전 생애 동안 이 예배만을 보고 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 100년 동안 이 예배가 유효할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는 점이다. 더 이상 길거리에서 북을 치며 전도하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전도해서도 안된다. 주민 신고가 들어 온다. 예배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예배에 신비가 없는 것은 예배 중에 성례전이 없기 때문이다. ‘성례’라는 라틴어 ‘세크라멘트’(Scrament)는 ‘신비’라는 헬라어 ‘미스테리온’(Mysterion)을 번역한 것이다. 성례인 성찬은 본래 신비였다. 따라서 예배 중에 성찬이 없으니 신비도 없는 것이다. 본래 매주 예배마다 성찬이 있었다. 초대교회에는 당연히 있었다.

중세에는 1년에 단 한번 부활주일에는 평신도들에게, 그것도 떡만 주었다. 이것을 개혁한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이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 마틴 루터, 마틴 부서, 존 칼빈은 매주 성찬을 거행하거나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과 성찬의 균형을 회복시켰는데, 그 후손들은 예배에서 성찬을 제거하면서 신비를 사라지게 한 것이다. 복음주의자인 존 웨슬리는 평생 주일예배마다 성찬을 거행했다. 아니 주마다 서너번은 성찬을 거행했다.

우리 예배에 하나님 중심성이 회복되야 한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만족을 구하는 요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우선할 수는 없다.

말씀과 성찬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시대, 웨슬리안 전통에서 드려지던 말씀과 성찬의 균형을 통한 은혜와 신비가 있는 예배로 바뀌어야 한다.

개신교 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이라는 교단의 정체성이 예배의 구조와 요소에 반영된 의미있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 예배는 바뀌어야 한다. 획일적인 예배 형태에서 시대변화에 따라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예배적 접근이 시급히 필요하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비예전적 예배뿐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