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열정 드리고 이웃에 사랑 실천한 100년
1917년 9월 26일, 일제 강점기 경성의 서쪽 관문인 무악재에 설립된 한우리교회(구 독립문교회)는 실크공장의 여공들이 모여서 만든 교회다. 공장 근처에 예배드릴 곳이 없었던 여공들은 무교정교회(현 중앙교회)에서 파송한 한상호 집사(무교정교회 첫 장로)의 집에서 10여 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당시 조선 땅의 많은 교회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고, 그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지만 한우리교회는 달랐다. 처음부터 한국인들, 공장에서 일하는 이름 없는 여성들에 의해 터를 잡았다.
여공들의 뜨거운 구령열로 교회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1918년 성도가 40명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60명이 모여 예배당이 비좁아졌다. 1922년엔 기도모임을 시작했고, 여공들은 어려운 형편 중에 500원을 모아 예배를 드릴 집 한 채를 구입했다. 이때 여공들이 만든 기도모임은 우리 교단 부인회의 시초가 되었고, 성미를 모아 약한 교회를 돕는 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문기 교수(평택대 교회사)는 “한우리교회는 여공들이 시작해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성장한 독특한 초기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우리교회의 이처럼 독특한 시작을 총회본부뿐만 아니라 미국 OMS 본부에서도 주목했다. OMS는 한우리교회를 ‘실크공장교회(Silk Factory Church)’라고 부를 정도로 여공들의 활약을 높이 평가 했다. 길보른 선교사의 부인(Mrs. Edwin I. Kilbourne)은 “실크공장의 여성 40명이 매주 수요일과 주일 밤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고 ‘동양선교사의 표준’(The Oriental Missionary Standard) 1922년 11월호 3면에 소개했다. 이들의 헌신에 감탄한 OMS는 한우리교회를 돕기 위해 미국에서 자발적으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여공들의 헌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공장을 퇴직한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일제 치하 36년과 6·25전쟁을 거치며 수난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이름 없는 여공들의 헌신의 터전 위에 세워진 한우리교회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달라져도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신앙, 지역과 이웃에 베푸는 교회, 교단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975년 성결교단 제30회 총회에서 한우리교회 여전도회가 최우수 전도기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교회부흥과 봉사에 인정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바자회를 통한 지교회 개척 지원 등 봉사하는 여성사역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교회
한우리교회는 기도하고 전도하는 전통을 세웠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한국교회의 구호가 바로 한우리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임영재 목사는 1966년 부임하여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이를 실천했다. 1990년 부임한 백장흠 목사도 큰 시련을 당할 때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고 강남에서 부흥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러한 복음전도(선교)의 열매는 국내외에 수많은 교회 개척과 해외선교로 나타났다. 한우리교회는 6·25전쟁이 끝나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1954년 홍은교회를 개척했고, 응암동 동편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응암교회도 설립했다. 서대문 인근에서 교회를 확장하던 한우리교회는 일찍 강남으로 눈을 돌렸다. 1969년 영등포에 봉남교회를 시작으로 1976년 강남구에 영동중앙교회, 1988년 서초구에 은혜교회를 지교회로 설립했다. 우리 교단의 강남시대를 연 교회가 바로 한우리교회였다.
또한 공직자선교회, 군선교회, 미용선교회, 부동산선교회, 성록선교회, 의료선교회, 이슬비 전도편지 사역팀, 축구선교회 등 전문선교회들은 현대적인 선교전략을 가지고 복음전도의 사명도 감당하고 있다.
복음전도는 국내에만 그치지 않고 해외에까지 이어졌다. 1979년도에 시작된 해외선교는 30국에 4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지금까지 총 31개 해외 교회를 세우고 학교도 세우는 등 선교의 울타리를 전 세계로 확장했다.
강남의 그늘진 이웃을 품다
독립문에 있던 교회는 1983년 서울 강남구 도곡동으로 자리를 옮기며 새로운 사명을 짊어졌다. 성전을 이전한 후 2004년에 ‘독립문교회’에서 지금의 ‘한우리교회’로 이름도 바꾸었다. “강남은 부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남의 그늘에 가려 소외된 이들도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교회가 사랑을 베푸는 일을 감당해 오고 있습니다.”(윤창용 목사)
한우리교회는 도곡동의 어려운 노인들을 교회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도 나눴다. 노인잔치는 노인대학설립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2001년 3월 22일 ‘늘푸른대학’을 개설하고 매주 목요일 마다 어르신을 돌보고 있다. 홀몸 노인을 위한 밑반찬 봉사도 벌이고 있다.
최근에는 아름다운가게와 연계해 불우이웃돕기 바자회를 열고, 교회 카페의 순수익 전액을 매달 강남구청 강남복지재단에 기탁하고 있다. 기부금 전액은 강남구내 어려운 형편의 청소년들을 돕는 데 쓰이고 있다. 이 밖에도 개안수술 지원,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 미개발국에 대한 원조 사업 등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한우리교회는 앞으로도 강남구 내 틈새 복지를 지속할 방침으로 향후 노인요양원 사역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작은 교회의 울타리가 되다
한우리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다. 매년 고난주간이 되면 사랑의 헌혈을 시행하고 있다. 2013년 헌혈과 동시에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을 벌였다. 서약식에는 404명이 동참했다.
태풍 볼라벤으로 피해를 입은 충남 부여 늘푸른교회를 찾아가 복구비용 1,200만 원도 긴급 지원하기도 했다. 귀운교회 성전이 불에 타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억2,000만 원을 쾌척해 재건축의 디딤돌을 놓게 했다.
100주년을 맞은 올해는 원산중앙교회(이원규 목사)와 전남 암태도의 암태중부교회(권명성 목사) 등 섬 교회 두 곳에 승합차를 지원했다. 노후된 차량이 수시로 고장나 어려움을 겪는 섬 교회가 더 힘내서 성도들을 실어 나르라고 힘을 보태 준 것이다.
100주년 이후 매년 교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선, 올해는 오송한우리교회, 예인교회, 온땅의빛교회, 참포도나무교회 등 4개 교회와 지교회 협약을 맺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교회를 새롭게 세우는 일도 필요하지만 약한 교회 하나가 자립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겠다는 것이다.
100주년을 맞은 한우리교회의 꿈은 ‘드림’이다. 하나님 앞에 먼저 나를 드리고, 서울 강남을 넘어 한국과 세계의 모든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드림 100’의 비전이다. 영적인 헌신과 동시에 또 하나의 드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웃과 지역, 인류를 위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실천(드림)하겠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드림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 선교 2세기를 향한 한우리교회의 드림(DREAM)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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