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13세기에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대학의 등장과 동·서문물의 교류로 학문적 붐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때마침 등장한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동방에서 유입된 철학적 방법론을 신학에 조화시켜 오늘날 일컫는 융복합, 즉 신학과 철학의 종합을 이루어냈다.

혁신은 그 시대의 키워드였다. 새로운 도전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그러나 변혁은 거기까지였다. 다음세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교회는 변화를 거부했다. 체제유지와 현실안주에 전념했다.

그 중심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가 있었다. 그는 세상과 교회 사이에 장벽을 세우고, 자신의 권위와 영광만을 탐닉했다. 절대 지지 않으려는 오만과 성직자가 지상최고의 수위권자라는 자가당착적인 편견으로 교황권의 몰락을 경험했다.

독일의 역사가 쿠어트 알란트(Kurt Aland)는 그의 실패의 원인으로 인격적인 자질부족과 시대 변화에 대한 둔감을 꼽았다. 변화와 진보를 외면하는 무지는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개혁의 선각자 얀 후스(1369~1415)의 화형은 좀 더 일찍 경험했을 진리, 자유, 양심의 시대를 100년이나 후퇴시켰다. “지금 거위(‘후스’의 뜻) 한 마리를 불태우나, 앞으로 100년 후에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며, 결코 불태우지 못할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종교개혁은 신앙의 변화를 기점으로 시대의 변화를 가져왔다. 루터는 로마서강의를 통해 바울이 전한 믿음을 새롭게 발견했다. 믿음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마음이요, 세상을 바꾸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참여이다. 믿음은 어떤 명제에 대한 이론적인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전적인 헌신과 참여이다.

믿음은 죄와 어둠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한다.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종교개혁이 가져온 프로테스탄트는 진리와 자유라는 변화의 열차에 합류한 시대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관행적인 율법적 신앙에 의혹을 제기했고,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에 도전했다.

무엇보다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진실과 양심을 짓밟는 무리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진리, 자유, 양심에 기초한 확고한 신념 앞에서 에라스무스가 말한 ‘우신(愚神)의 시대’는 결국 역사 저편으로 기울었다.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에서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다면, 1789년 프랑스혁명도 미국이라는 나라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황제 앞에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던 루터가 없었더라면 대격변의 원천이 자궁 속에서 소멸했을 것이기에 당연히 프랑스 혁명도 미국의 건국도 원인 무효라는 이야기이다.

종교개혁은 루터라는 한 개인에 의해서 발로되었지만, 시대 변화에 인식을 같이한 다수가 개혁정신을 함께 호흡하며 협력하여 완성한 하나의 작품이다. 그 안에는 다양성과 역동성이 시대정신과 어우러져 강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500년이 흘렀다. 오늘날 유럽의 발전된 자유민주주의, 교육, 과학, 예술 그리고 사회복지는 종교개혁의 수혜이다. 물론 교파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부의 불균형을 초래한 자본주의 또한 종교개혁이 가져온 부산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기념은 당연히 그들의 몫이다. 그들은 변화해야 한다는 당연성 앞에 주저하지 않았던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 자유정신을 이어 직면하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도전에 슬기롭게 대처할 패러다임을 끊임없이 찾고 모색하고 있다.

지난 겨울 이후 우리 사회는 연일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시대는 변했고, 계속 변하게 될 것임을 교회는 직시해야 한다. 교회의 참된 생명은 조직이나 외적인 규모의 웅장함에 있지 않다. 루터의 말처럼 교회의 참된 보물은 복음이다. 교회는 복음 외에는 전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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