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가에서 부르시다

  이병돈 목사는 1935년 8월 20일 충남 부여 은산면 신대리에서 부친 이창오 집사와 모친 이상금 집사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가족들은 조모 송신일 집사의 영향으로 일찍이 예수를 믿었다. 송 집사는 종종 병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의 종을 보내주옵소서. 이 손자가 자라서 목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이병돈은 한 때 신앙생활을 중단한 때도 있었는데 초등학교와 교회친구였던 황인탁(장암교회 명예목사)의 권고로 다시 교회에 출석하여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이명직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참석해 재림설교에 감동받고 중생체험을 했다. 이후 그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에는 학교를 결석할 정도로 교회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면서 이명직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서울신학대학에서 신학을 하겠다는 간절함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1951년 은산교회에서 송인구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우들과 백마강을 따라서 들길로 가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병돈아! 병돈아! 병돈아!”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당시 함께 걸어가던 주일학교교사 문세모를 흔들었다. “야, 너 지금 내 이름 부르는 소리 들었어?” 그러나 그 친구는 “아니, 난 못 들었어.” “하나님이 세 번 날 부르는 소리를 너무나 확실하게 들었어!”라고 말하자 친구가 그를 껴안더니 “네가 부럽다!”라고 말했다.

병돈은 그때 ‘나는 반드시 신학을 해야겠다!’며 헌신을 다짐했다. 그러나 부친이 신학교 진학을 단호히 반대했다. 그를 외면하고 식사도 같이 하지 아니했다. 그의 작은 아버지도 “귀신 신(神)대학엘 왜 가려고 하느냐?”라고 하면서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병돈은 신학대학 진학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부친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보이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세요. 다음에는 아버님도 기뻐하실 거예요. 교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목사님들도 자리를 잡고 반드시 인정받는 때가 올 거예요.” 그렇게 10여 차례 정도 반복했다.

결국 부친은 신학대학 진학을 승낙하고 돌아앉아 눈물을 흘렸다. 당시 사회에서 목사라고 하면 우습게 여겼다. 어떤 동네는 목사가 들어가려고 하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침을 뱉기도 했다. 부친은 자식이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거나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어오는 것을 자랑하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병돈의 부친은 “네가 그토록 원하니까 나도 어찌할 수 없다.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라며 허락했던 것이다.

그는 1955년 서울신학대학 신학본과에 입학했다. 그가 신학교 3학년 때 서울동덕교회 전신인 수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에 성도들이 “사모님이 계셔야합니다. 속히 결혼을 하세요”라고 부탁했다. 1958년 고향 은산교회를 함께 다닌 동갑 장영주 규수와 혼담이 있었다.

이 목사는 장 규수를 만나서 “나는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오, 사모는 많은 교인들을 보살펴주고 다독이고 수발도 해주고 상담도 해야 하는 힘든 일인데 그런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 규수는 “그건 내 마음에 정해져 있습니다. 부족한 면이 있을지 몰라도 최선을 다해 목회에 협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병돈은 1958년 장영주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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