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훈 목사
우리나라의 마지막 등대지기로 알려진 분이 형수의 형부다. 40년이 넘도록 우리나라의 동서남단의 끝자락 무인도의 등대지기로 살았다. 정년을 앞두고 신문과 방송 이곳저곳에서 인터뷰를 요청하니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었다.

어느 날 인도를 걷다가 덤프트럭에 사고를 당했다. 바퀴에 튄 돌에 그만 얼굴을 맞았다. 사고차량은 지나가버렸고, 그는 한쪽 눈을 잃었다. 외모도 잃었다. 그 후로는 방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거기서 죽었다.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착하게 산 사람에게 어찌 이런 일이?’라며 하늘을 원망했다. 가족들에게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다. 끝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감사에 실패한 사례다. 그는 정말로 감사할 수 없었을까? 생각을 바꾸어본다.

‘우리나라에서 한해 교통사고로 4,300여 명이 목숨을 잃는데 나는 죽지 않았구나, 감사하다’ ‘가수 이씨는 교통사고로 두 눈을 모두 잃었는데 나는 한쪽만 잃었으니, 감사하다’ ‘큰 돌이 튀어 얼굴이 크게 다치는 상황에서도 한쪽 눈은 볼 수 있으니, 감사하다’ ‘덤프트럭도 그 기사도 찾지 못했지만 건강을 되찾았으니, 감사하다’ ‘돌이 튀어 얼굴에 맞았지만 여타의 뼈는 상함이 없다니 감사하다’ ‘아내와 같이 걸었는데 나만 다치고 아내는 안 다쳤으니 감사하다’ ‘비록 장애는 얻었으되 여러 가지 나라가 제공하는 혜택도 누리니, 감사하다’ 이런 식으로….

한스 셀리(Hans Seyle, 1908~1982)는 1952년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캐나다 내분비학자로 몬트리올대학의 교수였다. 연구 분야는 스트레스였다. 80년대 중반 그가 하버드대에서 특별 고별강연을 하였다. 백발의 노교수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강당을 꽉 메운 채 강연은 시작되었고 모두 감동하였다. 강연 끝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셀리가 강단을 내려가는데 한 학생이 앞을 가로막고는 “선생님 우리는 스트레스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비결을 한 가지만 이야기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순간 그의 입에선 “감사(appreciation), 감사하십시오”라는 말이 나왔다.

그 현장에서 강연을 들은 한국 스트레스의 레전드 이시형 박사의 전언으로 그 놀라운 사실이 매스컴을 탔다. 감사가 바로 스트레스를 날리고 행복하게 느끼는 신경전달물질을 만들어내게 한다는 것이다. 한 평생 스트레스를 연구한 대학자의 입에서 나온 스트레스 해소법이 ‘감사의 생활’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감사의 언어, 감사의 인사, 감사의 마음, 사랑과 긍정의 마음, 따뜻한 마음에 고마움을 더하면 그게 바로 감사가 아닌가. ‘0.3초의 기적 감사의 힘’을 저술한 데보라 노빌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데 0.3초 밖에 안 걸린다고 말한다. 감사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감사는 지천에 널려있다.

믹스커피를 보고, ‘예전엔 커피와 프리마, 설탕을 차례로 물에 넣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있었지만 이제는 툭 털어 넣고 마실 수 있는 네가 있어 고맙다’고 감사할 수 있다. 책상에 늘 함께하는 스탠드 전기 불을 보고, ‘옛날엔 관솔불이나 석유램프에 불을 붙여 공부하다보면 아침녘 코에 시커먼 그을음이 묻어났지만 네가 있어 쉽게 켜고 끄고, 안전하게 책을 볼 수 있으니 고맙다.’고 감사하는 식이다. 감사의 계절, 감사에 성공해야겠다. 감사에 성공하면 행복해지지만 감사에 실패하면 불행해진다.

만약 그분이 덤프트럭의 큰 사고로 한 쪽 눈을 잃고도 감사하며 과감하게 세상으로 나왔더라면 그는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 터.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같은 프로그램의 강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7)
감사에는 중독이 없다. 다만 치유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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