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근면한 농부처럼 ‘농심목회’ 실천
교단부흥과 교계연합 사역에 헌신·모범

전 총회장 홍순균 목사는 정직하고 근면한 농부가 큰 열매를 거두듯 목회 또한 근면한 목회자가 교회를 부흥케 한다는 ‘농심목회’ 철학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가 농심목회 철학을 품게 된 것은 7년의 농촌교회 목회를 통해 농부의 마음, 즉 농심을 체득한 결과다. 평소 그는 “농심으로 목회를 한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단언할 만큼 농심목회를 강조했다.

교단의 많은 인사들은 홍 목사를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어려운 시절 많은 구호물자가 교회로 들어왔는데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 조차 구제품 곁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홍순균 목사는 1922년 여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건축가를 꿈꾸며 일본 와세다대학 건축과 교외생으로 강의록을 받아 공부했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역사에 눈을 뜨면서 인생관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46년 3월 강단 앞에 엎드려 밤새워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보이면서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하는 찬송가 가사가 들려왔다. 그 때 홍 목사는 거듭난 사람으로 소명을 받았다.

새롭게 개척된 명륜동교회에 다니던 중 김동수 전도사가 그에게 목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홍 목사는 이 말에 부담을 느껴 삼각산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오직 주의 교회만 섬길 것을 결심했다.

신학교 시절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달팠으나 어머니의 기도, 누님의 헌신적인 후원으로 1950년 신학교를 졸업했다. 섬기던 명륜동교회가 형편이 어려워 교역자를 정식으로 청빙할 수 없었지만 그는 마다않고 첫 목회지로 삼았다.

그해 6월 홍 목사는 김제군 백구면 부용교회로 부임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터졌다. 부용에도 7월 북한군이 쳐들어왔다. 피난을 떠나던 일부 교인들이 “인민군이 목사, 전도사는 모두 죽인다”는 말을 전하며 홍 목사에게 서둘러 피난을 가자고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란 내용의 설교를 했던 게 생각났다. 홍 목사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차마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짐을 내려놓았다. 이 순간이 홍 목사 목회사역의 분수령이 되었다.   

1953~1957년 전북 함열교회에서 시무한 홍 목사는 1957년 역사 깊은 북교동교회에 부임했다. 1964년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북교동교회에서 교단 총회가 열렸다.

목포 앞 수많은 섬의 청소년들을 위한 바울성경학교 개설을 지원했다. 목포는 교단별로 유난히 갈등이 심한 지역이었다. 이런 가운데 홍 목사는 목포시 교회연합회장 직분을 10년 간 역임하며 교단 위상을 높였다.

특히 성령충만을 사모해 1966년 부활주일부터 오순절 성령강림주일까지 50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선포하고 기도하는 데 소문이 나면서 초교파적인 모임이 되었다. 기도회가 끝나는 날에는 소방차가 나타났다. 소방차 망대에서 보니 북교동교회 근처에 불길이 치솟았다는 것이다.

14년 동안 시무한 북교동교회를 떠난 홍 목사는 1969년 부산 부용교회에 부임해 6년간 시무했다. 부용교회는 교단 분열 당시 중립을 지키다가 홍 목사가 부임하면서 기성에 가입했다.

1975년 대전중앙교회에 부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으나 1979년 제34회 교단 총회에 맞추어 헌당예배를 드렸다. 이 총회에서 홍 목사는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1983년에는 자원하여 부산교회에 부임, 10년간 시무했다. 대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누가 떠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분수에 맞는 교회로 옮겨야 한다는 목회철학을 실천했다.

부산교회는 홍 목사가 매우 힘들어했던 목회지였지만 영남 3개 지방회가 연합하여 부산신학교를 설립하고 12년 간 교역자양성기관인 부산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홍 목사는 1992년 11월 23일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이 밖에도 홍 목사는 서울신대 이사회 감사, 부산지방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장, 유지재단 이사, 서울신대 이사, 총회 목사고시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교단 부흥과 교계 연합을 위한 사역에 열정을 보여 왔다.   

홍 목사는 또 평소 교단 잡지 활천에 애정을 갖고 글을 발표했는데 1992년 은퇴와 동시에 활천사 초대사장(1992년~1995년)으로 취임해 오늘의 활천 발행의 기반을 닦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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