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했던 개척교회 사역

이 목사 부부를 중매한 분은 은산교회의 장수완 장로(한국성결신문 사장 장광래 장로의 선친)였다. 장 장로는 이 목사 부부가 어릴 때부터 신앙을 지도했고 또한 사모와 가까운 한 집안간이다. 장 장로는 훗날 이 목사를 고향 은산교회 목회자로 청빙하여 목회사역에 적극 협력하며 은산교회 부흥에 기여했다.

1958년 신학교 3학년 시절에는 마포구 수정(현 동덕)교회에 부임했다. 수정교회는 김봉업 장로가 부산수정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13가정 40여 명의 신자들을 주축으로 개척한 교회였다. 지붕은 천막으로 덮었고 각목을 세워 판자를 붙이고 밖에는 얇은 판자로 어긋나게 붙여 세운 교회건물이었다.

이 전도사 부부는 성도들이 성미를 모은 쌀과 얼마의 자급으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갔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신학생 친구 서넛이 자주 찾아와 저녁을 먹고 가면 목요일이 되면 일주일 먹을 쌀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때부터는 국수로 혹은 호떡과 냉수로, 때로는 신학교 기숙사식당에 종사하는 집사가 건네주는 누룽지로 끼니를 이었다.

기숙사 식당에서 누룽지를 가지고 오다가 오토바이가 그 누룽지 보따리를 치는 바람에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져 눈물을 쏟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호떡 4개와 냉수를 떠놓고 감사기도를 드리다가 사모가 울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위로해주며 함께 눈물을 쏟은 일도 있었다.

1년 동안 열심히 목회하니까 교회가 성장하여 40명이 모이던 성도가 90명 이상 모이자 천막예배당이 비좁았다. 이때 고향의 부친이 논 300평을 팔아 봉헌하여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고 주택도 꾸리고 풍금, 강대상을 들여놓아 교회모습이 확 달라졌다. ‘이제는 누가 와서 목회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961년 1년 만에 교회가 교인 100명으로 성장했을 때, 사감 손택구 목사의 권유로 경남 통영(충무)중앙교회에 부임했다.  

성령세례 받고 성령사역하다
그런데 뜻밖에 1962년 부친의 별세로 부임한지 1년 3개월 만에 사임하고 고향인 은산에 돌아가야 했다. 장남으로서 호주가 되어 논 3,600평 밭 1,200평의 큰 농가가업을 이어 모친을 봉양하고 동생들과 처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은산교회 담임 홍종현 목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까 “무조건 올라와, 나하고 같이 일해, 교육전도사로 있으면 되잖아, 자급은 많이 못줘도 성의는 표시할 거야, 올라와.” 결국 고향에서 목회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사례비는 교회의 따듯한 정에 감사하면서 사양하고 약간의 교통비만 받았다. 그는 대농가의 가업을 이어가면서 모교회인 은산교회의 전도사로서 담임목사를 도와 주일학교, 학생회, 청년회부서를 맡아 동분서주하며 힘껏 봉사했다.

고등공민학교 설립
이 목사는 은산교회에서 특수목회사역에 관심을 기울였다. 시골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목격하고 경제사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고민하다가 대학을 나온 세 명의 교사와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치자는 마음으로 맨손으로 고등공민학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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