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운동 주도 목회자들, 정부수립도 앞장”
해방 후 정부수립 이끈 목회자 10명 조명

“일제 강점기에 항일 민족 활동을 주도했던 개신교 목사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수립에 앞장섰으며 당시 좌익에 맞설 만한 유일한 조직은 교회였다.”

해방 후 개신교 목회자들의 역할을 조명한 심포지엄이 지난 12월 1일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렸다.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가 주관하고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정서영 목사)이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항일운동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두드러지게 활동했던 목회자 10명을 조명했다.

박명수 교수에 따르면 이윤영 목사는 감리교 소속으로 북한 개신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서북 감리교의 중심인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이였던 이윤영 목사는 일본 감리교와의 통합을 반대하다 파면됐다. 광복 후에는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조선민주당 부당수를 맡았다.

당수 조만식이 연금되자 월남한 이윤영은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으로 반공·반탁운동을 벌였다. 서울 종로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됐고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되기도 했었다. 박명수 교수는 “이윤영 목사는 조만식을 대신해서 월남한 북한 기독교인을 이끌었다”며 “특히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수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핵심인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은선 교수(안양대)는 배은희 목사의 건국활동에 대해 소개했다. 배은희 목사는 일제 강점기에 전북의 대표적 민족운동가였으며 해방 공간에서 정치에 참여했다.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였던 그는 교육 운동을 벌이고 임시정부를 지원했으며 신간회 전주지부장을 맡았다. 배 목사는 광복 후에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독립촉성국민회 전북지부장과 전국대회 회장으로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이 교수는 “배은희 목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일관되게 밝히며 대한민국 정부 출범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김정회 교수(서울장신대)는 이남규 목사와 전남 지역의 기독교 활동에 대해 강연했다. 이남규  목사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목회와 정치를 병행했다. 목포 연동교회 담임이었던 이 목사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본 장로교와의 통합을 반대하다 해임되고 투옥됐다. 광복 후 전남을 대표하는 목포 양동교회에 초빙 받은 그는 목포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좌익이 건준을 장악하자 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해 반탁운동을 했다. 이후 목포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된 뒤 초대 전남지사로 임명됐다.

충청도에서 활동한 구연직 목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강세였던 충청북도의 우익을 이끌었다. 충북의 첫 번째 교회인 청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일제 말기 부임한 구 목사는 광복 후 치안유지회 위원장, 미군정 고문, 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장으로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청주제일교회 교인들은 구 목사의 영향을 받아 반공청년단에 적극 참여했다.

구 목사는 또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세광중·고교를 설립했다. 이영식 교수(총신대)는 “구연직 목사는 일제 치하 민족주의 운동의 터전이었던 청주제일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설에 적극 나섰다”고 말했다.

조남수 목사는 제주 4.3사건 때 무고한 양민의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조 목사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했다. 광복 당시 제주도의 유일한 목사였던 조 목사는 4.3사건이 발발하자 “자수자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군경의 약속을 받고 주민 설득에 나섰다. 그의 진심 어린 연설을 듣고 3,000여 명이 자수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가 담임했던 모슬포교회는 중산간 지역에서 내려온 이재민 구호에 힘썼다.

허명섭 교수(서울신대)는 “조남수 목사는 4.3사건을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규정하면서도 과잉 진압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안타깝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