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적으로 성탄절에 대한 초기 언급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기독교 문헌에서 나타난다. 이는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문화가 오늘날처럼 기독교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초기 기독문화는 성탄절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카타콤베의 벽화들이 이를 설명하는데, 그리스도 탄생과 관련된 그림은 3세기 후반에야 나타난다.

4세기 이후, 기독교는 이교문화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로마제국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적인 면에서 기독교전통과 로마의 이교전통은 서로 간의 충돌과 배척, 융합과 토착화라는 과정을 겪는다. 성탄절 문화는 이 두 문화에 대한 관계를 보여준다. 먼저, 로마제국에서 12월 25일은 “정복되지 않은 태양”(Sol Invictus)의 탄생일로 로마의 축제일이었다. 반면 354년으로 추정되는 필로칼루스의 ‘연대기’에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지켰던 교회문화를 보여준다.

이러한 로마의 축제일과 교회의 성탄기념일의 일치는 ‘기독교가 로마문화를 수용한 것인지’, 혹은 ‘이교축제로부터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조처였는지’ 여전히 학자들의 토론 가운데 있다. 분명한 것은 이교적 환경과 토양에서 성서의 성탄문화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뿌리내림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베들레헴의 탄생교회가 건립된 점으로 확인된다.

교회력에 따른 성탄문화는 하루만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었다. 다음해 1월 6일 주현절을 맞이하기 전까지 이어지는 기간이었다. 이러한 성탄기간은 부활절을 모방한 구조로 발전했던 것인데, 부활절 이전 사순절을 지킨 것처럼, 성탄절 이전에 4주간의 대강절이 이어진 것이었다.

고대교회 성탄문화가 정착할 당시 교회의 성탄설교는 소망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였다. 북아프리카 밀레브의 옵타투스(Optatus) 이름으로 내려온 성탄설교는 헤롯의 베들레헴 유아학살과 관련해서 고난과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소망과 용기를 주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를 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osius)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균형, 그리고 삼위일체를 강조하는 성탄찬송(veni redemptor gentium)을 지었는데, 당시 아리우스의 왜곡된 신앙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찬송시의 내용일부는 다음과 같다.

1. 오소서 만인의 구세주여,
   동정녀 탄생을 나타내사
   모든 세상을 놀라게 하소서
   이러한 탄생은 하나님께 합당하도다.

2. 사람의 씨앗이 아닌
   신비한 숨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도다
   육신의 열매가 나타났도다.

3. 그분이 방에서 나왔도다
   순결의 왕실에서
   두 본성의 영웅
   서둘러 길을 열망하도다

4. 그의 달림은 아버지에게서 나와
   아버지에게 돌아가네
   음부에까지 내려가
   다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네.

5. 당신의 구유는 환하고 선명하네
   새로운 빛과 밤은 서로 엉켜있네
   밤은 소멸하지 않고
   끊임없는 믿음으로 빛나도다.

고대교회의 성탄문화는 오늘날과 같은 휘황찬란한 트리장식문화와 선물문화는 아니었다. 고대교회의 성탄문화는 고난 받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고, 성도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며,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그분을 찬양하며, 올바른 믿음을 선포하는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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