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복 장로
현송월, 김여정, 심지어 천안함 폭침의 주역 김영철까지 와서 환대 받는 것을 보면서 1년여 만에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지, 대통령의 힘이 절대적임을 실감한다. 눈 얼음판에서 열린 겨울운동이 끝나고 나니 ‘미투’운동이 번지고 있다. 남성에게 치욕적인 성추행·폭력을 당한 여성이 상대자를 사회에 고발하는 이 캠페인은 법조계, 연예계, 문학계, 학계, 종교계, 사회단체를 망라하여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투는 여성 인권 문제다”라며 사법당국의 개입과 범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미투’(me too)는 ‘나도 그렇다’는 뜻이다. 긍정과 수긍을 말하는 일반적 용어다. 그러나 지금 유행하는 ‘미투’는 ‘나도 당했다’, ‘이제는 당하고만 살지 않겠다’는 고발성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어쨌든 ‘미투’라고 하면 누구나 젠더 폭력과 연관 지어 생각하게끔 되었다. 사회 어디서나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가시적·비가시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고 억누르는 성문화가 잔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금수저 흙수저론이 횡행하더니 지금은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강력한 체제변화가 사회 각 분야에서 시도되고 있다. 적폐란 사회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불법, 불의, 부도덕, 불합리, 몰상식, 부조리 등 등 정상에서 벗어난 폐단을 총칭한다. 법적수단으로 적폐를 다스릴 수도 있지만 도덕적·윤리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들이 더 많다.

‘미투’운동도 사회적 적폐청산의 시각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여성들이 특정조직에서 여러 모양으로 당한 성적 모욕을 사회에 널리 고발함으로써 개인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한편 남성 우월적 성적폐단을 막고자하는 여성 사회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성적으로 당한 부끄러움을 증거를 제시하면서 발설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소속 집단에서 스승이나 상급자 또는 선배로부터 당한 성적 치욕을 오랜 기간 가슴에 묻고 살아 온 여성들의 상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수십 년 전의 일을 버리지 않고 들춰내는 것을 보면 이해 할 수 있다.

‘미투’에서 심한 곤욕을 치르는 대상은 피고발자다. 한 솥 밥을 먹던 사람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적 가해자로 고발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매장을 면치 못하게 된다. 가정 파탄으로까지 치달을 수도 있다. 형사적 처벌을 면한다 하더라도 명예 회복은 어렵다.

‘미투’운동이 주는 사회적 효과는 뭘까. 크게 보면 적폐청산의 한 의미로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메스를 가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성적인 대상으로 함부로 생각하는 풍조를 잠재울 수 있다. 반면 한 여성의 사회적 고발이 SNS 누리꾼들의 흥미의 도구로 사용되어 인간조직의 질서와 화합을 허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조직은 사람관계를 기초로 하여 구성원에게 역할과 기능을 배분한다. 남녀 간의 지나친 조심성이 조직발전에 흠으로 작용할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은 ‘미투’운동으로 여성의 억압적 성문제가 다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사회가 존재하는 한 여러 형태의 성 문제는 늘 있기 마련이다.

정부 차원에서 ‘미투’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성 윤리를 바로 세워 가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남녀 구성원의 건전한 생각, 가치관, 행태는 바람직한 성 문화를 창조한다.

교회는 안전지대일까. 교회조직내의 목회자와 성도가 때로는 권위자와 추종자의 관계로 비쳐지는 경우가 있다고 본다면 목회자의 조심성이 보다 강조된다. 일탈된 교회에서 그 같은 문제가 더러 일어난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고발사회가 정녕 좋은 사회일까. 행여 조직에서 소외된 개인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나타난 자의적인 행동이 고발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마구 남발되는 SNS 댓글이 사람들의 행동을 움츠리게 하는 시대다. 문득 “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8:7)는 말씀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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