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화면으로 바라본 일본 동북부의 쓰나미는 상상을 초월했다. 먼 바다에서는 파도였다가 점점 강도가 세지고 뭍에 오를 때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경천동지의 현장이었다.

이즈음 아침마다 신문에서는 새로운 #Me too와 그에 연이은 놀라운 사안들로 가득 차 있다. #Me too 사건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정점을 찍는다. 이보다 더 큰일이 있을까, 싶은데 또 다른, 더 센, 더 기가 막히는 일들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가온다. 거대한 지진해일이다. 차기 대선 주자라는 높은 타이틀을 쥐고 있는 지사의 비서관, 평범하고 수수해 보이는 삼십대 여자의 입은 바짝 마르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느리고 작은 말투로 미루어보아 충분히 여린 심성이 보였다.

그녀의 말은 어느 명료한 문장보다 더 선명하게 폭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거절이란 것을 지사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 거절은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가까이 다가선 포식자 앞에서 어린 양의 거절은 오직 죽기 살기로 달리는 것뿐이다. 그녀의 작은 거절이 어린 양의 달리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Me too 성폭력에 대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거길, 그곳을, 그런 못된 놈들을, 잘 피하지 왜 그렇게 만들어, 성폭행 사건에 분노하면서도 슬쩍  피해자에게 눈길을 주는 보수꼴통의 시선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어느 책에선가 성폭력을 한번 당한 여성들이 다시 또 그 상태에 서게 되면 똑같이 당한다는 글을 보며 왜 그래 바보같이, 대항해야지 다시 또 그런 상황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서지현 검사가 쓴 글 전문을 읽어보며 그제야 내가 단지 그런 입장에 처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도 당하게 되는, 여자들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 있는 사회의 구조가 보였다.

누군가에게 죄질을 묻는 집단에서 조차 여성 검사를 추행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들은 못 본 척했다. 그렇다면 힘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얼마나 심할까? 얼마나 많을까? 

#Me too는 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보다 더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앉아있는 권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비열한 권력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가장 천박한 생리를 지니고 있다. 힘에 의해 좌우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장 저질스러운 행태, 그래서 문정희 시인은 ‘곡시’에서 외친다.

이제,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이담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피로 절규한 그녀의 유언은 오늘도 뉴스에서 튀어나온다/탄실 김명순! 그녀 떠난 지 얼마인가/이 땅아! 짐승의 폭력, 미개한 편견과 관습 여전한 이 부끄럽고 사나운 땅아!

현재 #Me too는 문화라는 껍데기를 부수고 예술이라는 미명에 철퇴를 가하는, 시대조차 해체하는 강력한 철학의 발현처럼 보인다. 새로운 판을 짜는 공동체적 사안이며 그리하여 쓰레기들을 치우고 나면 새로운 시대의 도약으로 이어질 것이다.

누군가 내게 장난치듯이 물었다. “교계는 안녕하신가요?”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소수의 목자스럽지 않는 목자들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가끔 생겨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았던가요? 사실 성도와 목자 사이는 권력 관계가 아니랍니다. 그러니 #Me too를 할 만한 일이 일어나질 않는 거죠. 굳이 권력의 각도에서 셈을 해본다 해도 목자는 언제나 ‘을’이거든요.”

제발 교계에서는 그저 #with you 만 하고  #Me too 는 일어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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