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부동교회 1대목사로 교회건축 앞장

원세성 목사는 성결교회 본부로부터 1924년 7월 서울 체부동교회 초대 주임목사로 임명받았다. 오랫동안 성서학원 학생감으로 공적이 있는 그를 체부동교회 목회자로 선정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체부동은 왕궁 이웃 동네로, 왕궁의 고관들과 콧대 높은 양반들이 집단으로 살면서 기독교를 깔보며 유교와 유학을 숭상하는 곳이었다. 이들을 복음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왕궁고관 출신인 원세성이 가장 적격자였기 때문이다.

체부동교회는 본래 무교동교회의 기도처로, 처음 누하동에서 무교동 신자 몇 명이 예배드리다가 1923년에 통인동으로 옮겼다. 1924년 1월에 열심 있는 신자들의 전도로 장·유년 40명이 모이자, 성결교회 본부에서는 수백 년 동안 사대부 양반들이 거주하는 체부동을 겨냥하여 월세 20환으로 13평 한옥 한 채를 세를 얻었다. 이어 ‘체부동교회’ 간판을 걸고 그 해 6월에 창립예배를 드렸으며 원세성 목사를 전격적으로 주임목사로 파송한 것이다.

원세성 목사는 유교의 전통에 젖은 벼슬아치들이 모여 사는 체부동의 교회목사로 전임하자, 이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께 철저히 맡겨 기도를 더욱 열심히 했다. 즉 양반 동네에 양반 전도자가 파고든 것이다. 그의 뜨거운 기도와 헌신으로, 2년 만에 양반 동네의 완고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장유년 100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교회가 부흥되자 13평의 한옥으로는 도저히 신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신자들은 결단하고, 1926년 사무연회에서 성전건축을 결의하고 다음과 같이 실천사항을 결의했다. 1)신자들은 무시로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한다. 2)정오 사이렌이 ‘뚜우’하고 울리면 신자들은 모든 사무를 중지하고 즉시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한다. 3)매주 1회씩 직원들이 모여 기도한다. 4)건축헌금궤를 만들어 푼돈을 넣어 저축한다. 5) 부인들은 밥 지을 때 한 숟가락씩 쌀을 떠내어 모아 성미로 드린다.

1928년에는 장년 80여명, 유년이 130명이 모여 2백여명의 교세로 부흥되었다. 체부동교회 부흥소식이 동양선교회 기관지에 보도되자, 이 보도를 본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휫셔 부인이 감동되어, 1930년 10월에 당시 4천원이라는 큰 금액을 체부동교회 건축금으로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교회건축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4년간 신자들이 기도한 응답이었다.

원세성 목사는 힘을 얻어, 먼저 교회의 터를 유학자들과 궁성관리들이 모여 사는 북촌 체부동 한복판에 60평의 대지를 사고 붉은 벽돌 32평을 웅대하고 높게 교회를 신축하였으며 교역자 사택 7칸을 규모 있게 건축했다. 교회와 사택 건축에 든 경비는 휫셔부인의 헌금 4000원을 중심으로 동양선교회와 체부동교회 신자헌금 등 총 4876원 78전이었다.

마침내 1931년 6월 4일 오후 2시에 성전봉헌식이 성대하게 드려졌다. 이에 대해 활천은 “조선의 구식건물이 즐비한 곳에 화려한 양옥 한 채가 우뚝 솟아 이채를 드러내는 것도 기쁘려니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장엄한 기세를 떨치고 있고, 십자가 위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붉은 피를 자랑하듯 뭇 영혼이 살길을 찾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도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원세성 목사는 봉헌식 날 저녁부터 4일 동안 전도성회를 개최했다. 저녁마다 유명한 강사들이 한 시간씩 맡아 전도 강연했고, 노방전도를 하여 100여명의 결심자를 얻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교회는 날로 부흥되었다. 양반들의 텃세로 전도가 어렵다는 곳에 크게 승리한 양반전도자 원세성 목사!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이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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