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정의 신앙생활

신치정의 신앙생활
신치정은 신앙생활에 매우 열심이었다. 아예, 교회밖에 모를 정도였다. 그가 있는 곳은 늘 교회였다. 또한 기도생활에 힘썼다.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옛날에 봉화 불을 비춘 산이라는 봉수동 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때로는 새벽 3시에도 갔다.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다. 눈이 푹푹 쌓인 날은 장화를 신고 갔다. 봉수동 산에 기도자리 바위가 다 닳았을 정도였다. 특별기도 제목은 일본이 얼른 망하라는 것이었다. 

부흥회 같은 때 교회 새벽기도회가 늦어지면 신치정 영수의 산기도도 늦어졌다. 외손녀 윤영희는 할아버지의 봉수동 산기도에 따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성경을 읽고 후포리로 편지를 썼으며, 종종 윤영희 본인이 대필했다고, 그리고 동생 영석을 목사 만들고 싶어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윤영희 권사는 말했다. “할아버지는 일본인들을 싫어하여, 내가 한인들의 학교인 원산상업이 아닌, 일인들 학교인 원산고녀를 다니는 것도 못마땅해 하셨어요. 제가 서울 이화여전에 가서 공부하고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죠. 일본이 망하기를 늘 기도하셨지만, 동네서는 일인들과 불편하지 않게 잘 지내셨어요. 일인들도 할아버지를 얕잡아보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존경했지요. 일인들이 할아버지의 봉수동 산기도를 알면서도, 속으로는 화가 치밀었겠지만, 잘 아는 사이니 어떻게 방해하지 못했죠. 교회가 아닌, 집에서도 강사를 초대해서 부흥회 같은 집회를 이따금 하였는데, 어쩌다 일인들도 참여했던 것 같아요. 때로는 중(僧侶)도 참여하여 할아버지가 전도하신 기억이 나요. 또, 공산당 사상을 철저히 거부하셨죠. 1.4후퇴 직전인데 우리들을 서둘러 남한으로 보내셨어요. 북한에서는 신앙생활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을 아셨던 거지요. 모든 게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어요. 자랑하기 싫어하시고, 당신의 과거 얘기도 안하셔서 이래저래 할아버지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걸 알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에요.”

고향 땅에 교회 설립
일제의 마수에 마구잡이로 긁힌 강토는 그 상처를 쥐어짜며 울고, 내일의 희망을 잃은 동포는 하루하루 목에 풀칠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꼼지락거리던 암울한 시절이다.

일제의 잔학성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지만, 밖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부단히 움직였다. 조선의열단과 한국독립당이 중심이 되어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이 결성되었는데, 이를 모체로 1935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창설된다.

여기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발전적으로 형성되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갖게 된다. 한편 임정 고수자 이동녕, 김구 등이 주체가 되어 한국국민당이 1935년에 창당 되고 1937년에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이 결성 된다. 이처럼 이 민족은 희망을 버릴 수 없어 끊임없이 대한독립을 위해 분투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시대, 신치정 영수는 60세가 넘었다. 정신없이 살아온 그는 고향을 생각한다. 가난과 무지, 게으름으로 내일의 소망이 없는 고향 땅이 부쩍 안타깝고 그립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자신을 구원한 복음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처럼 인다. 그는 서둘러 고향 갈 채비를 했다.

신치정 영수 62세, 1936년 3월 10일, 이방의 갈릴리 땅 같은 후포리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드디어 교회가 설립되었으니, 후포성결교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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