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자살이 갑자기 화두로 떠오른다.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인구비율로 가장 높다는 충격적 소식이다. 연간 1만3,09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배부른 나라가 되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자살자가 대폭 늘어간다. 저출산 추세를 감안하면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크다. 한반도에 사람의 씨가 마를 날이 무섭게 다가온다.

미국의 자살률도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2015년 기준 4만 4,193명이나 된다. 특히 미국에서 문제가 더 되는 것은 자살자 대부분이 총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형 총기사고와 함께 미국이 총으로 망한다는 아우성이다. 게다가 미주한인들의 자살률도 아시안계에서는 최고란다. 

자살자가 많다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생명가치의 절대성’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법 곧 생명의 가치는 수단으로 결정되어서는 안되고 그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교훈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자기 생명은 자기에게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래서 ‘천하보다도 더 귀중한 생명’이라고 예수님은 단호하게 선언하셨다. (마16:26). 절대자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이라 해도 자기가 소유권자가 결코 아니다. 그래서 자살은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또 다른 반역행위이다.

성경에는 자살 사례가 매우 드물다. 거인 삼손이 자살특공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요즈음 말로 자살폭탄을 터뜨리기는 했다.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그분은 제자였던 유다의 배신, 대제사장 등의 유죄선언, 로마총독 빌라도의 승인, 군중들의 인민재판, 로마군대의 사형집행을 통하여 죽음을 맞으셨다. 어느 것으로 보나 완벽한 타살임을 전혀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처럼 전적 타살만은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이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유도하신 흔적도 꽤 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구조단 파송을 요청하면 즉각 사형집행을 모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마26:53).

7만 2천명이 넘는 로마군대 규모이다. 하지만 그런 저항을 포기하시고 단연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셨다. ‘피동적 자살자’가 되셨다. ‘자의 반, 타의 반’ 처형이기보다는 오히려 ‘100퍼센트 타살, 100퍼센트 자살’이 아닐까.

거듭 말한다. 그분은 자신을 사형으로 몰아넣는 적대자들과 적극적 전투를 벌여 자신의 목숨을 능히 보호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온전한 타살이면서 온전한 자살’로 이해된다. ‘온전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사람’이라는 신학적 논리와 평행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한다. 삼손이나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살 곧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는 우리 모두가 당연히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모든 자살자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자살은 막아야 한다. 특별한 소명에 따라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끊어서는 안 된다. 살기에 힘겹다는 이유로 목숨을 끊는 것은 절대로 성경적이 아니다. 자살할 용기를 뒤집는다면 그 용기와 결단으로 이 험악한 세상을 넉넉히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어떤 결단인가. ‘자살’이라는 낱말을 뒤집으면 바로 ‘살자’가 된다는 그 결단이다. 그런 철석같은 결단을 하는 사람이라면 창조주 하나님은 살아갈 길을 반드시 마련해 주신다.

유다도 자살로 마감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자살의 용기를 ‘살자의 용기’로 바꾸었어야 했다.  청년 사울을 보라. 스데반을 죽인 뒤에 ‘자살’이 아니라 단연 ‘살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졌고 얼마나 위대한 사역을 했던가.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신자비율이 매우 높은 나라들이다. 그런데 그토록 자살자가 많다니 먼저 믿은 우리들의 직무유기처럼 들린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어서 속히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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