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형은 목사(서울제일지방, 성락교회)

6.13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코앞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로 유지되고 발전된다. 그러나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존재했던 적은 없다.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단어의 뜻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형태라는 것인데, 현대 사회의 통속적인 민주주의에서 현실적으로는 국민이 주인임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선거 운동을 할 때만큼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아주 깍듯하게 주인으로 떠받든다. 일정한 주기로 돌아오는 선거를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성패가 달려있다. 선거를 통해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사회의식을 이어가는 것에 민주주의의 생사가 달려있다.

선거는 선택이다. 누구를 뽑느냐는 오로지 유권자의 몫이다. 선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통속적으로는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느냐를 본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이 가장 기본이고 그 밖에 이런저런 사회적인 연결 끈이 작동된다.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했다는 선진국도 이런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투표가 나와 연관된 사적인 관계로만 진행된다면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없다.

더 바람직한 선택의 기준은 각 후보자가 도전하는 직책에 얼마나 적합한가를 평가하는 것이며, 그와 연관된 정책일 것이다. 이 정도에 들어서면 공공성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공공성이다.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사적인 이해관계에 얽힌 감정적인 판단이 훨씬 강하다. 소집단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공공선과 대의가 실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에 드러난 양승태 대법관과 연관된 재판 거래도 그런 단면이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에서는 선거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는가. 어떤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 가장 대표적인 오류를 말한다면, 무조건 기독교인 후보를 뽑는 것이다. 선거는 신앙을 평가하는 마당이 아니다. 어떤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 또는 그 후보의 신앙이 좋다는 것이 직무의 적합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후보들에 대한 평가가 엇비슷하다면 기독교인을 찍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목적을 갖고 선거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독교의 사회적 리더십은 근본적으로 교세의 강화에 달려있지 않다. 어느 도시 전체를 기독교화 한다는 운동도 있고 민족과 나라 전체를 복음화 하자는 열망도 있지만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기독교인이 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성경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사회와 시대를 이끄는 기독교의 리더십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공공성과 공공선의 가치를 주도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성서의 가치관과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세계 전체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연관된다. 바른 신앙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끌어안는 데서 성숙해간다.

기독교 신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보여주시는 것, 곧 계시에 근거한다. 계시에는 특별계시와 일반계시가 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집중하는 특별계시에 강하다.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음을 가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에 특별한 열정을 갖고 있다. 반면에 복음이 삶의 현장에서 작동하여 나타나는 사회적 연관성은 취약하다. 복음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실현되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 인식도 부족하다.

일반계시에 근거한 핵심 가치를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적 인륜도덕, 생태적 환경윤리, 법치의 민주주의, 상생의 시장경제 등이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네 가지 가치를 확신하고 이를 이끌어가야 한다. 서로 반목하고 인간성을 짓밟는 반인륜, 하나밖에 없는 지구 생태계를 죽이는 환경 파괴적 세계관, 소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독재적 정치 행태,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를 정당화하는 독점적 자본주의가 결코 성경적일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 일반계시의 가치가 성숙해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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