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세계 온 인류가 주목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태산명동 서일필’ 정도 아닌가. 큰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알고 보니 쥐 한 마리의 소행이었다는 뜻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니까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남한출신이다. 6.25 당시 초등학생 때 잠시 북한식 교육을 받고 40년이 지난 후 평양을 처음 방문했다. ‘기독교평양복음화대회’ 준비위 총무 자격이었다. 남북한과 해외 한인신자들이 평양에 모여 집회를 열기로 합의했는데 그 실무준비차 위원장 김의환 목사와 함께 갔다. 하지만 그 대회는 안타깝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서울 측과 평양 측의 정치적 벽이 너무 높았다.

그 때 처음 밟은 북한 땅에서 공산권 선교를 위하여 기도한 것과 김일성대학교 종교학과 단기교수로 초빙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그러나 미국에 돌아온 뒤, ‘조국을 배반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살해협박장을 받기도 했다. 북한 측 소행이 분명했다. 비판적 시각에서 북한방문기를 언론에 게재한 것이 북한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서울신학대학교의 교수직 복직도 좌절되었다. 

북한이 미국과 관계가 개선되고 워싱턴과 평양에 각각 대사관이 개설되면 북한에도 모든 자유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특히 종교의 자유보장이 필연적이다. 과거 북한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조문이 있었지만, ‘반종교 선전의 자유’라는 독소조항도 있어 종교, 특히 기독교의 씨를 말려왔다.

그런데 평양정부는 비핵화에 대해 ‘김일성 수령의 뜻’이라는 말을 또 내세운다. 김일성 어록이 북조선 헌법이나 노동당의 결의보다 우위에 있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하여 무어라 할까. 그것이 앞으로 있을 종교자유 폭의 가늠자일 것 같다. 그래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나타난 기독교관을 몇 가지 살펴본다.

김일성의 조부 김응우는 대동강에 정박했던 샤먼호 배를 공격하는 선봉장이었고 그 손에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당했다. 아버지 김형직은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를 중퇴했고 기독교 학교의 교사도 지냈다. 어머니 강반석은 외가가 기독교집안이었고 예배당에 비교적 열심히 다녔다.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봉화리의 기독교인들은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명신학교에 모여 새벽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김일성 자신이 독립운동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을 때에도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김일성 자신은 “동심에 맞지 않는 엄숙한 종교의식과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껴 교회에 잘 다니지 않았다”며   “성장과정에서 기독교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지만 기독교 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나의 사상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하느님이 정말 있어서 례배당에 다니시나요?” 하고 김일성이 물었다. “아니다. 죽은 후에 천당 가서는 뭘 하겠니. 사실은 너무 피곤해서 좀 쉬자고 간다”고 대답했다. 김일성의 기독교관은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 경우가 절정을 이룬다. 해방 후 안신호는 조선민주녀성동맹 부위원장으로 함께 일했다.

처음에는 ‘밤낮 성경책만 끼고 다니는 독실한 신자’ 였다. 그러다가, ‘리념이나 신앙을 초월하여 민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함께 일하자’는 김일성 권고에 순응했다. 공산당에 입당했고 성경책 속에 당원증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새 조선 건설에 분투한다는 보고를 들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이 김일성의 결론이다.

이런 회고록 서술들이 김일성 종교정책의 전부는 아닐 것 같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종교개혁의 본산인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통치를 하겠다는 말에 주목한다. 김정은 정권은 최소한 중국이나 월남 수준만큼이라도 종교자유의 폭을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전망한다. 그런 근거가 김일성 어록에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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