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미래는 기독교의 성스러운 자산”

정병식 교수
지난 2천년의 교회 역사는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희망의 말씀’이요,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임을 보여준 살아있는 역사이다. 교회는 2천년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난관과 역경을 겪었다.

그러나 교회는 고난의 파도를 넘어섰고, 앞으로도 능히 넘어설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사7:14), 하나님이 다스리심(단4:26)을 믿음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희망을 노래하고 계속 노래할 수 있으며, 노래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전례없는 어두운 시대에 직면해 있다. 전세계는 과학 문명의 진보, 세속적 진보주의, 합리적 신계몽주의의 등장으로 문화적 혼돈의 통증을 앓고 있다. 특히 모더니즘의 공격은 기독교의 생존에 회의감을 갖게한다. 그래도 우리는 일말의 동요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더니즘이 거센 파도가 되어 끝없이 몰아친다 해도 진리의 복음은 교회를 지키고, 소생시키고, 회복시킬 것이다. 또한 변함없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능력이 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희망찬 미래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이다. 십자가 사건은 현세에서 영생으로, 의심에서 확신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삶의 자리가 바뀌는 변곡점이다. 기독교의 희망은 사변과 논리로 가득찬 철학적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주어진 값진 희망이다. 초기교회는 박해와 고난을 받았지만 2천년 기독교 역사의 희망의 빛을 예비했다. 믿음이 있는 곳에 희망이 산다.

희망찬 미래는 기독교의 성스러운 자산이다. 믿음의 눈만이 이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역사는 이 성스런 자산을 받아 전하는 역사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 이니라”(렘29:11).

이것을 위해 교회는 두려움이 없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복음을 신뢰하며 담대히 세상에 나아가 새로운 기독교 르네상스를 위해 살고 일하며, 기독교 신앙의 소망으로 어둠에 맞서야 한다.

제112년차 교단총회는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는 성결교회’를 표어로 삼아 오늘의 성결교회가 직면한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며 선교적, 목회적, 신앙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교회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식은 ‘정반대로의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합리적 생각과 윤리적 이치로는 파악하기 힘든 초월적 길이다.

둘째, 복음을 사수하라. 복음은 복된 소식이요, 희망찬 미래의 전령이다. 교회는 복음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복음을 증거하는 나팔이다. 교회의 최고의 보물은 복음이다. 교회의 역사는 복음 증거의 역사다. 교회의 교회됨은 복음 증거에 있다. 복음만이 희망을 말하고, 복음만이 참된 희망으로 안내한다.

셋째, 진정한 겸손과 솔직한 고백을 두려워마라. 예수를 따르는 교회는 자신을 희생하는 교회이다. 기독교의 참된 모습은 낮아짐과 비움에 있다. 기독교의 강함은 약함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은 내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해진다(고후12:9)고 했다. 역사 속의 참된 교회는 약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강했다.

또한 희망은 고백에 담긴 선물이다. 고백하는 교회만이 희망할 수 있는 교회이며, 고백하는 자만이 희망하는 자이다. 기독교 역사는 고백의 역사이다.

넷째, 소명에 충실하라.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태어나고, 직임을 통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은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증인과 섬김의 삶을 산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명의식은 미래 기독교를 좌우할 희망의 나침반이다.

소명에의 충실만큼 희망적 미래를 풍기는 향기는 없다. 소명에 충실한 자에게 내일이 있다. 소명에 충실한 교회에 미래가 있다. 하나님은 소명에 충실한 교단을 통해 그 분의 나라를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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