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바친 헌신과 목회생활 시작

성도들이 한 해 농사를 마친 농한기를 맞이해서, 규암교회는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강사의 설교 말씀을 듣기 전에 부르는 찬송에서부터 은혜가 임하기 시작했다. 특히 찬송가 중에 보혈찬송을 힘차게 부르며 박수를 쳤는데, 나무 장작을 떼는 난로의 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의 뜨거움이 교회 안을 태우고 있었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박수를 치며 계속적으로 부르는 찬송의 능력에 유상준 집사는 마침내 마음이 뜨거워지며 회개의 눈물을 쏟아냈다. 주먹으로 아무리 눈물을 닦아 내도 눈물은 멈추지 않고 눈물범벅이 되었다.

강단에서 외치는 부흥강사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유상준 집사의 심령을 흔들었다. 유상준 집사는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집회가 끝나 모두가 떠나간, 텅 빈 교회당에서 유상준 집사는 교회 뒷자리에 엎드려서 울고 또 울었다.

유상준 집사가 큰 은혜를 받은 후, 인생관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는 지금까지 걸어온 사업가의 길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교회의 부흥에 관심이 많아졌다. 유상준 집사는 하나님의 교회 일을 하는데서 삶의 의미를 두고 가치를 찾았다.

자기의 사업에도 열심이었지만 그는 이제 교회 일에 적극성을 띠고 충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목사님의 신임을 받아 목사님이 출타하시면 교회서 설교도 하고, 장례식도 목사님 대신 인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의 가슴에 붙은 사명의 불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문제는 유교사상이 투철하고 세상 지식이 풍부한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또 학문에 능한 장인어른의 합리적인 반대도 극복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제대로 알고 믿어야 두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겠구나. 신학교에 들어가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배워서, 바르게 전해야 되겠구나”하고 생각을 한 후, 크게 결단했다.

그는 한창 번창하던 양계장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부인과 자녀들을 나복리 본가에서 당분간 살게 한 후, 1955년 4월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아 서울신학교 전수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서울신학교 3학년에 이르러, 신학생 실습목회지로 부여 근방 옥산교회에서 1957년 정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봉사했다. 신자들은 그를 전도사로 불러주었고, 그는 한 학기를 마친 후에 1958년, 전북 익산 내곡교회에 가서 목회하였다. 이 때는 규암교회 집사 시절의 교회 봉사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어 신분은 신학생이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성실한 목회를 했다.

1958년 3월 10일 서울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 해 5월에 미당성결교회에 부임하였다. 미당교회에 부임해서는 아내가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리며, 어려운 성도들의 옷을 만들어 주었다. 잘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려 발육이 정상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예배 후에 몰래 불러서 밥을 먹이고 보살펴 주는 등 사모의 봉사가 빛났다.

그는 미당교회를 섬기면서 1960년 12월 20일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유상준 목사는 교회 지붕에 비둘기를 키우고, 뜰 안에서는 양을 길렀고, 뒤뜰에는 꿀벌통 2개를 놓아 벌꿀을 땄다. 이것은 수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했고, 양은 순종을 의미했고, 꿀벌은 쉼 없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성경말씀대로 교육하고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