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목사
‘역청이 무엇을 의미했느냐’하는 문제는 레위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히.카파르)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히.카파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속죄하게 하였나니’에서 ‘속죄’와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에서 ‘속한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카파르’입니다. 창세기에서 방주의 ‘역청’, 레위기에서의 ‘속하다’라는 말과 어근이 같습니다. 역청이 무엇을 상징하느냐 라는 문제는 여기에서 풀립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리고 피는 죄를 없이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보존합니다. 이 피가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 곧 ‘속죄양의 피’를 가리킵니다만, 이 ‘피’는 곧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즉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역청’을 통해서 예고편으로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방주에서 하나님의 심판 도구이자 죽음의 상징이었던 홍수가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역청이 했습니다. 이 역청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목적인 원시적 복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 생명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무서운 죽음에 위협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우리를 어찌하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역청의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 보혈의 피가 우리의 생명을 없애고자 하는데서 역청 역할을 하여 보호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카파르’란 용어가 총 46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에는, 특별히 레위기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예표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남겨놓으실 때 오직 한 가지만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예수의 피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분명한데, 우리가 지은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만들었으나 이 인공지능이 나중에는 통제불능의 컴퓨터가 될 수 있듯이 죄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했으나 이제는 어느 누구도 이 죄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죄에 대한 무력감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방주에 물이 들어오면 방주를 침몰시키듯이 죄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이는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죄에 대한 회개를 해야하며 죄짓는 결과로 지옥의 불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저급한 이야기로 치부합니다. 이제는 천국과 지옥을 전하면 순진하고 고지식한 목사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 심판이 임하지 않았다고 해서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심판은 하루 하루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할 수 있는 오직 한 길을 주셨는데 그것은 오직 예수의 피입니다. 이것을 방주의 ‘역청’을 말씀하시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물심판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 역청으로 칠해진 방주 안에 있어야 하듯이 불심판에서 구원 얻으려면 예수의 피를 경험해야 합니다.

진리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있고 죄에 대한 거룩한 회개 없이 십자가와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썩은 가치관 속에서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은 예수의 피를 반드시 경험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 밖에는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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