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정으로 지역주민을 섬긴 목회

가을걷이를 마친 11월에는 전교인들이 지게, 달구지, 낫, 톱, 도끼 등을 챙겨 근처의 산으로 갔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난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런 일에도 앞장을 섰지만,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진해서 섬긴 봉사였다.

그 해 겨울에는 유명한 부흥강사 이성봉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하여 지역의 유지, 학교 교장, 의사 등을 교회로 초청해 미당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총회에서 선교사들이 방문할 때는 폭스바겐차를 운전해 오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마을 냇가에 헬기가 착륙했을 땐 온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보는 헬기를 구경하기 위해서 미당지역 전체가 떠들썩하게 모여들기도 해서 그 덕에 교회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갔다.

유상준 목사는 1963년 7월에 논산교회로 부임하였다. 당시 논산교회는 1961년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을 때, 그의 모교회 규암교회가 예성을 선택하자, 그도 예성에 속했다. 그러자 본래 기성을 주장하는 신자들과의 분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과반수 이상이 기성을 고집하고 대지를 확보해 따로 교회를 건축하고 논산제일성결교회 간판을 달았다.   

교회의 분쟁으로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는 영적인 분위기를 회복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자체 부흥회를 열었을 때는,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 때부터 1년간 3개월에 한 번씩 그의 인도로 초교파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멀리 초촌지역에 사는 성도들은 교통이 불편함에도 꾸준히 참석하였다. 다른 교회 교인들은 논산교회에서 준비한 봉사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은혜를 사모하였다.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모두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했다.

논산교회 부임 초기에 분리된 교회와 소유권 문제로 오랫동안 갈등이 지속되었다. 논산교회는 분리되어 나간 제일교회보다 교세가 뒤쳐졌지만 전교인이 합심기도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는 계룡산 삼불봉으로 산기도를 자주 다니면서 기도했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는 목회하면서 평생을 “사랑, 기도, 아멘”을 얼마나 외쳤는지, 논산교회에 부흥회를 오시는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아멘” 소리에 먼저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논산성결교회는 기도하는 교회, 말씀이 충만한 교회, 새벽기도회에 타 교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소문이 났다.

60년대, 70년대,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도, 시각장애 전도사가 물어 찾아오면 2~3일이나 10일까지도 머무르게 하고, 몸을 씻을 때는 물을 따듯하게 데워서 섬겼다. 밥을 먹을 때는 반찬을 숟가락에 얹어주었다.

시각장애인인 윤연호 전도사는 “사모님은 얼마나 밥을 빨리 하시는지 가족들은 칼국수를 먹일지라도, 교파와 상관이 없이 지나가다 오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따뜻한 밥을 새로 지어서 대접하였다”고 말했다.

논산성결교회는 1973년 성결교회 제2차 합동 때 예성을 탈퇴하고 기성교단으로 합동했다. 이런 화해 분위기를 타면서 교회는 더욱 성장했고, 80년대까지 논산 시내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4개 교회의 교세가 비슷해졌다. 그는 소비가 미덕인 세태를 한탄하고 근검절약을 강조하며, 교회나 주택에서부터 모범을 보였고 소비를 최소화하여 낭비나 허비가 없었다. 

교세가 비슷한 4개 교회 중 논산성결교회 전기 사용료가 항상 최저여서 한전 논산지점에서는 ‘논산성결교회가 도전(盜電)한 것 아닐까?’ 의심하며 교회의 내선과 외선을 교체했으나 이상이 없자 “논산성결교회는 근검절약의 모범 교회”라고 인정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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