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만에 혈육만나 애틋한 정 나눠
두 조카 첫 만남에 “동생이랑 꼭 닮아”
“다시 또 만나자” 희망 품어

“감개무량합니다. 고향에 다녀왔다는 것 자체가 제겐 큰 축복이고 영광이었습니다.”

최동규 목사(대포리교회 원로·사진)는 지난 8월 20~22일 이산가족 상봉 길에 올라 어린 시절 헤어졌던 여동생의 두 자녀를 만나고 돌아왔다. 북에 두고 온 두 여동생을 만나고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둘째 여동생은 20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막내 여동생은 최 목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쓰러져 행사장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 목사는 여동생들을 대신해 둘째 여동생의 자녀 박춘화·박성철 씨를 만나 이산의 한을 달랬다.

“조카들을 본 적도 없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두 조카가 여동생을 쏙 빼닮았더라구요. 황해도 말투를 사용하는 조카들을 보니 ‘정말 내 가족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읍후리가 고향인 최 목사는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가 17세 때 6.25 전쟁 이 발발해 아버지와 큰 누나 내외, 첫째 여동생과 함께 남한으로 넘어왔다. 어머니는 할머니를 모셔야하기에 북에 남기로 했고 둘째 동생과 막내 여동생은 어리다는 이유로 몽금포에서 백령도로 넘어 오는 배를 타지 못해 북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17살에 헤어짐의 아픔을 겪은 최 목사는 69년 동안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항상 그리워했다.

최 목사는 “헤어진 가족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아픔이 마음 한 곳에 항상 있었다”고 고백했다.

수십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한 최 목사는 두 조카들을 보자마자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 목사는 2박 3일간 짧은 만남을 통해 조카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며 여동생들을 보지 못한 아픔을 달랬다. 몇 십 년 만에 만난 그리움을 몇 번의 만남이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최 목사는 그저 감사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무래도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지만 거듭해 만날수록 대화는 편안히 이어졌다. 고향이 그리운 최 목사가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조카들은 처음 듣는 것처럼 매 순간 성심 성의껏 듣고 대답했다.

2박 3일간 단체상봉 3번과 개별상봉 1번, 총 4번의 짧은 만남 후 헤어짐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슬픔에 또 다시 이산의 아픔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지만 최 목사는 조카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조카 춘화 씨는 또 만날 날을 위해 매년 최 목사에게 줄 고추장과 된장을 담그겠다고 약속했다. 최 목사는 “‘장은 묵어야 맛이 있다’는 춘화의 말에 다시 볼 날을 기약하며 기분 좋게 고향 땅을 떠나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최 목사는 “다음번에는 막내 여동생도 함께 또 볼 수 있으리라 하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며 “귀한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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