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되지 않는 마라의 사건 ②

이성훈 목사
‘마라’라는 말은 맛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사용합니다만, 인간 내면의 상태를 드러낼 때도 사용 됩니다.
‘쓴 맛’이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마라’는 인간의 괴로움과 힘듦을 나타냅니다. 룻기의 나오미의 탄식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기근을 피해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던 나오미는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 만큼 힘겨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곳에서 남편 엘리멜렉을 잃었고, 이어서 그곳에서 두 아들 말룐과 기룐도 잃습니다.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작은 며느리 룻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이 사람이 나오미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고 하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고 합니다.

‘희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자신의 이름인 ‘나오미’라고 불리우는 것이 마치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고 비아냥 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나오미의 태도는 그녀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고 힘들어 했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일컬어 ‘마라’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아픈 내면의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사흘 길을 물을 충분히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발견한 그 우물물을 ‘마라’라고 지은 이유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우물물을 ‘마라’라고 부른 이유는 그 물이 정말로 짜서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아무도 마실 수 없고 그래서 물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 쓴 물의 상태가 곧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외견상으로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비참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자존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잠시 병이 들었다 하여도 이내 병상을 털고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부터 짊어져야 할 수많은 고난을 겪어 나가기에는 그들의 상처와 아픔이 너무 컸습니다.

애굽에서의 노예로 살며 자라난 쓴 뿌리는 지도자 모세에 대한 원망과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과연 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이는 쓴 물로 인하여 고통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히. 아니 아도나이 로페에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는 그들의 아픔과 상처와 쓴 뿌리를 치료하시고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담은 자기 계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아내가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자녀가 부모를 저주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죽일 듯 미워하고 상처주며 살아갑니다.

가정에 눈물이 있고 교회에는 아픔이 있으며 인생에는 ‘마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치료하는 하나님’(히. 아니 아도나이 로페에하)이란 하나님 계시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오직 그 분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그 분을 기다리십시오. 힘들고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오직 그 분 한 분 바라십시오. 그 분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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