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과 발등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기도

유상준 목사의 목회 특징 중 하나는 교인들의 염습을 도맡아 하는 것이다. 한 분, 한 분,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도 정성껏 고인이 된 성도들의 몸을 닦아 주었다. 그것을 본 유가족들과 나이 많은 성도들은 “나도 세상을 떠나면, 유 목사님이 꼭 내 몸을 염습해달라”고 했다.

그가 염습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자, 철도사고 등으로 무연고 시신이 생기면, 당국에서 유상준 목사에게 염습을 부탁했다. 그러면 그는 시신을 깨끗이 정성스럽게 염습하고 장례를 잘 치러주어 모두들 감탄했다. 화지동에 있던 교회가 좁아서 반월동의 미나리 밭을 구입해 교회건축을 시작했다. 온 교회 성도들이 기도하며 벽돌을 날라서 몸을 아끼지 않고 열정으로 교회건축이 되어갔지만, 건설업체가 부도가 났다. 그러자 그는 큰 아들이 사는 집을 팔아서 그 돈으로 건축을 계속했다.

교회당을 건축한 뒤에는 결혼식과 민방위대 교육 등 공공행사에 교회를 개방하였다. 목회 말년에는 새벽기도 시간에 ‘하늘가는 밝은 길이’ 찬송을 부르면 그날에 성도 한 분이 소천해서 교회 장례를 치르게 되는 일화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는 선견적인 영안이 있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할 때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밤을 지내고 새벽이 되면,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진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루 일을 끝마칠 때면, 낙타는 주인 앞에 또 한 번 무릎을 꿇는다. 주인이 등에 있는 짐을 다 내릴 때까지 주인 앞에 엎드린다. 볼품없이 툭 불거진 낙타의 무릎은 주인에 대한 순종과 복종의 흔적이다.

유상준 목사, 그는 무릎과 발등에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마치 낙타의 무릎처럼 순간순간 순종하고 복종하는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은 사람이다. 자신을 꺾고 엎드린 그의 굴복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치열한 행위언어(body language)였다.

부흥회를 많이 다닌 그는 성대가 좋지 않았다. 성대 수술을 하고 전주 예수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담당 의사가 “성대를 보호하려면 말을 절대 하지 말고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설교 때마다 우렁차게 소리치며 설교했고 성대에 다시 문제가 생겼다. 그는 세 차례나 더 병원을 가서 수술을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 받을 수 있었다.

유상준 목사는 배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1972년 목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신학석사, 1981년 미국 풀러신학대학 연수교육, 1982년 숭전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수료, 1988년 서울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1985년부터는 충청지역의 많은 교역자를 양성한 대전신학교에서 요한계시록을 수년간 강의하였다. 논산교회 새벽설교 때도 계시록 설교를 자주 해서,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경건한 자세와 태도를 신자들에게 철저히 일깨워 주었다.

유상준 목사는 1971년 논산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약 35년간 논산교회를 섬기다가 1988년 10월 논산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은퇴한 후에도 강사로 부르는 교회에 가서 열심히 부흥회를 인도하고 평소에도 새벽기도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의 형제 야고보처럼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로 평생을 목회한 유상준 목사는 2008년 7월 여름날에 만 80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영원한 고향 천국으로 귀환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끝>

969호(9월 1일자) 14면 일화이야기④ 23행, 26행, 34행, 48행, 49행, 51행 ‘논산제일성결교회'를 ‘논산성결교회’로 정정합니다. 교회'를 '논산성결교회’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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