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신사참배 거부 등 일제시대 항일운동 앞장

최초 신사참배 거부사건으로 한국교회사에 빛나는 강경교회(최낙훈 목사) 100년(1918~2018)의 역사를 담은 책이 출간됐다. ‘강경교회 100년사’는 강경교회 역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의 협력으로 출간됐으며 현대기독교연구소 연구위원 장금현 박사가 집필했다.

강경교회는 한국사회와 교회에 역사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강경교회 100년사는 한국 근현대의 100년사라 할만하다.

강경교회는 설립이야기부터 드라마틱하다. 동양선교회 초대감독 존 토마스 선교사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0일 강경을 방문해 교회의 사택을 조사하고자 옥녀봉을 올라갔다가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한 일본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이 일로 인해 영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인 마찰이 일어나 일본은 토마스에게 5만 엔의 배상금을 주게 됐다. 토마스는 배상금 5만 엔 가운데 일부를 드려 강경교회를 건축했다.

강경교회는 교단의 여러 지도자를 배출했고 백신영 전도사도 그중 한 명이다. 백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을 다닌 후 정신여학교의 교사를 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창설해 결사부장이 되었고 이후 일제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됐다.

그 뒤 1922~27년 다시 전도사가 되어 강경교회에 부임했고 그의 가르침으로 주일학교가 크게 부흥했다. 백 전도사는 이후 1933년 경성성서학원의 여자 사감으로, 전국 부인회 회장으로 한국여교역자의 지도자가 되었다. 문준경 전도사도 그의 제자이다.

강경교회는 또 최초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주일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하나님 사랑과 민족사랑을 가르칠 때 일제는 강경에 신사를 세워 강경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철저한 신앙으로 무장한 강경교회 주일학교 교사이며 강경공립보통학교 교사 김복희 선생과 그 제자 57명은 이를 거부해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강경교회는 또 한국성결교회의 사부인 이명직 목사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오영필 목사, 일제의 국가총동원운동을 거절하고 일왕의 심판을 외치다 투옥된 이헌영 목사, 복음을 지키려다가 평양에서 순교한 이태석 목사 등 교단의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또 독립운동과 성청운동, 주일학교운동에 앞장선 평신도지도자 윤판석 장로도 강경교회 출신이다.

강경교회 100년사를 집필한 장금현 목사는 교회사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당시의 자료(당회록, 사무총회록, 주보 등)를 참고했고 자료가 소실되거나 수집이 불가능한 경우 관련자들과 면담을 통한 구술방법을 사용했다. 또 100년의 역사 동안 현재 제19대 담임 최낙훈 목사까지 각 목회자들의 사역을 서술하면서 그 특징들을 정리해 분류했으며 어린이부터 장년까지 평신도들의 사역 전반을 다루었다.

강경교회 100년사를 출판한 최낙훈 목사는 “역사편찬위원들과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고 가슴 아파하기도 했으며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숭소한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며 “이 모든 역사가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을 하며 100년사를 큰 은혜로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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