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지혜)을 사랑하는 것은 헬라인의 특색이고 금전을 사랑하는 것은 페니키아인과 이집트인의 특색이다”라고 말한 것은 위대한 철인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이 페니키아인과 이집트인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중해 무역의 중심을 차지했었던 고대 페니키아인과 이집트인들의 상술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마음만은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페니키아인이나 이집트인들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지만.

▨… 사도 바울이 플라톤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그 답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플라톤을 닮은 한마디를 남겼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라고.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플라톤이 기독교인들을 알았더라면 페니키아인과 이집트인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마디를 덧붙여 주었을까?

▨… 한국교회의 어느 신학자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아는가하며 일침을 놓는다. 그에 의하면 교권이 타락했던 중세기에 일어났던 현상들이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 범람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성직자와 교회의 부유함, 성직 사고팔기, 친인척에게 성직 물려주기, 돈이 들어오는 여러 직함 가지기, 이권 따라가기, 미신적 신앙 부추기기, 성직자의 권위주의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범죄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박충구, ‘예수의 윤리’)

▨… 플라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을 알았더라면 페니키아인, 이집트인을 삭제하고 한국의 그리스도인(성직자)들이라고 정리하지 않았을까. 소름돋는 상상이라고 화를 내실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 성결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플라톤을 깨우쳐 주려 할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성결인들은 그런 기대를 아직 접지 않고 있다.

▨… 감사주일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인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열어주는 새로운 삶의 미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꾸준히 준비하고 있는 우리 성결인들은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초대로 이미 감사에 넘쳐 있다. 성결인의 감사를 금전으로 환산하려 하는 자는 아마도 플라톤이 말했던 페니키아인이나 이집트인일 것이다. 종교가 왜 과학이되려 하느냐는 비아냥을 멈추게 할 답은 금전으로 환산하지 못하는 감사에 있음을 성결인이라면 당당하게 선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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