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아프다. 고통과 탄식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정치권의 갈라치기 말고도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패가 되어 혐오의 저주를 쉼 없이 읊조리고 있다. 생김새가 다르다하여 서늘한 왕따의 대상이 되어 끝내는 주검이 된 어린 중학생의 소식도 들린다.

우리 사회 최고의 판관이 되어야 할 법관들은 공정치 못한 판결의 주인공이 되어 적폐의 심장이란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성공한 기업가는 폭력조직의 대부처럼 법위에 군림하고, 묻지마식 폭력이 사회의 구석구석을 서글픈 사연으로 도배하고 있다.

아픈 현실이다. 우리는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곳이 어디인지 길을 잡아 줄 스승의 목소리도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우리 사회는 종교인보다 비종교인의 숫자가 더 많은 세속화 사회가 되어버린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신론자가 전체 인구 대비 15%에 달하는 세계에서 5번째 국가이기도 하다. 우리보다 앞서 있는 무신론 국가는 중국(47%)과 일본(31%), 체코(30%), 프랑스(29%)뿐이다. 사회가 이처럼 세속화되고, 또 무신론자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미래지향적 가치를 제시하는 방향타를 찾기 어렵다.

그 점에서 우리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정작 이 사회에 필요한 소금과 등불의 역할보다는 다른 것에 매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론 교회 안에, 혹은 교회 외적인 문제에 적잖은 에너지를 쏟으며 골몰할 때가 종종 있음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세상도 방향타 없이 방황하는데, 교회 역시 못지않게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이때 우리가 새겨야 할 오래된 격언이 하나 있다.

“in necessariis unitas, in 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우리에겐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알려졌지만, 실제론 17세기 마르코 안토니오 도미니스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은 도미니스보다 한 세대 뒤에 활약한 리차드 벡스터에 의해 영어권 세계로 확장되었고,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명한 현대의 설교자와 기독교 사상가로 이름 높은 존 스토트가 성서적으로 균형 잡힌 그리스도교를 주장하며 이 격언을 강력히 앞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오래된 문장은 지금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적확히 지적해주고 있다.

우리는 본질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 믿음의 정수와 고갱이는 무엇인가? 우리가 잊지 말고 포기할 수 없는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그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한다는 이 고백적 선언만큼 우리 교회의 본질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에 교회는 집중해야 하고, 아울러 그것을 세상에 그대로 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듯, 당신들 곁에 우리 교회도 함께 있음을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흔들리는 한국 사회를 제 길로 가게 만드는 가장 큰 길잡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충실한 본질집중은 곧 마지막 문장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사랑하라!” 우리의 사랑 행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에 기반한다. 바로 우리가 본질에 하나를 이룰 때 가능한 신앙적 행위이며, 이것이 우리 사회의 아픔을 치유할 몰약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을 이어주는 것이 비본질에는 자유로움이다. 본질이 아닌 것에 몰두하여 경쟁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본질에 충실함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도미니스의 격언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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