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간직해 두었더라

이성훈 목사
언젠가부터 헬리콥터 맘이란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마치 헬리콥터처럼 자녀의 머리 위를 맴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비록 헬리콥터 맘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으나 그런 부모를 연상케 하는 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신 그 시점 어간에 이 여인은 자신의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 편과 왼편에 각각 앉게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을 이 땅에서 왕좌를 차지하는 영광쯤으로 오해를 한 듯 합니다.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며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보다 앞으로 예루살렘 여인들과 자녀들이 당할 고통이 더욱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도덕과 윤리가 황폐화되고 하나님을 더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의 교육에 마음을 빼앗겨 소위 ‘성공’을 손에 쥐어 주면 자녀들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한 초등학생이 학교를 가는데 중얼중얼 거리며 길을 걷더랍니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부모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말입니다.

부모들은 최선을 다해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믿지만 자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해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워하고 염증을 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노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채 훈계만 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이기적인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자녀들이 영적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요셉을 평가할 때 우리는 요셉이 비행청소년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피어난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쯤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 속에는 야곱이라는 ‘아버지의 신뢰’가 배경으로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하였을 때 창세기 37장 11절에는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우리는 단지 아버지가 그 꿈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라는 의미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간직해 두었더라’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샤마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단순히 기억하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의지적으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어떤 신뢰의 행위’라는 뉘앙스가 포함된 말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이 꾼 꿈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물론,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다른 사람들은 내 아들 요셉의 꿈을 듣고 비웃지만 저 아들이 실망하지 않고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좌절에 빠져 있을 때에도 꿈을 상기시켜 주며 요셉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낱 한 여름밤의 꿈으로 평가절하할 때 그의 아버지 야곱만큼은 요셉의 꿈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격려하고 힘이 되 주었던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요셉 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가 있다면 제가 이런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아버지가 되어 이 거친 세상을 믿음으로 이기며 살아가는 자녀가 내 품안에서 세워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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