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규 목사
목회자의 조기 은퇴가 교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아마도 목회를 잘한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65세 또는 그때를 전후로 과단성 있게 은퇴한 사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인 것 같다.

반면에 다른 형태의 이른 은퇴도 있다. 목회자는 원치 않지만 주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이른 은퇴다. 이런 경우는 목회자가 목회를 잘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을 때 생긴다. 나이가 들어 에너지가 떨어지고, 설교나 심방 등 목회 활동이 느려지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목회자를 모시기 위해서 이른 은퇴를 압박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계에 점차 이상한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조기 은퇴하는 것이 옳고 아름다운 일이며, 따라서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65세에 은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목회를 잘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여기저기서 목회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유명한 목회자들은 이미 많은 것을 누렸고, 일찍 은퇴해도 여전히 할 일이 많고 경제적으로도 문제가 없지만, 준비가 안 된 보통 교회의 평범한 목회자들에게는 조기 은퇴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자. 단순히 조기 은퇴의 순기능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침체 또는 쇠퇴를 막고 그 역동적 에너지를 살리기 위해 좀 더 빨리 젊은 목회자에게 리더십을 물려주려는 의도 자체는 정말 가상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기 은퇴 자체를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조기 은퇴 현상이 이 시점에서 왜 부각되고 있는지 그 본질을 봐야 한다. 

조기 은퇴를 교회론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목회자를 바꾸려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일정한 사고방식을 관철하려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 여기에는 양적 성장을 제일주의로 삼는 왜곡된 교회관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양적 성장’만을 교회의 목표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근대주의가 낳은 폐해임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얼마 전에도 모 교회 목회자가 한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부임한 지 수년 동안 교회가 많이 성장했지만 여전히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둘째, 교회를 세우는 목회의 책임을 전적으로 목회자에게만 지우는 잘못된 생각이 조기 은퇴 현상에 숨어 있을 수 있다. 건강하고 역동적인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책임이 목회자에게만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이런 생각이 강할수록 목회자는 청빙이 아니라 고용이 되며, 목회자는 기능적인 역할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셋째, 조기 은퇴 현상의 이면에 성직주의 사고방식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성직주의란 성직자 중심의 교회관에서 나온 것인데, 평신도를 수동적이고 낮은 부류로 생각하는 그야말로 영적으로 어두웠던 중세 시대에나 통했던 낡은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목회자에게 모든 사역을 맡기고 의존하기 때문에 평신도를 구경꾼으로 만든다. 평신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기 은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교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다. 함께 책임지는 모습이 중요하다. 조기 은퇴 현상의 이면에 깔려 있는 옳지 않은 심리적 기제는 자칫 병리적 현상이 될 수도 있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현상에만 우리의 시각을 고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 현상의 심층적 차원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우리에게 필요하리라 본다. 목회자든지 평신도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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