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이트(S.Freud)가 야간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중에 겪었던 일이다. 여행객 모두가 잠들었을 시간에 프로이트가 타고 있던 열차 칸의 문이 복도의 화장실 쪽으로 덜컹하고 열렸다. 그 순간 프로이트는 열린 문 틈으로 잠옷에 겨울 모자를 쓰고 있는 어떤 남자를 보았다. 그는 그 남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려던 찰나 프로이트는 그 남자가 사실은 열린 문에 달려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S. 프로이트, ‘두려운 낯섦’)

▨…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이 체험을 ‘도플갱어’ 현상 체험으로 간주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같은 문학작품들이 즐겨 다루었던 도플갱어 현상은 같은 시간에 동일인물이 다른 장소에서도 목격된다는 조금은 허황하고 기괴한 상황을 기저에 깔고 있다. 서구인들은 도플갱어 현상이 자신의 육체에서 빠져나간 영혼 때문에 빚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문학작품을 쓰기도 했었다.

▨…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안이 추악하게 타락해가고 있을 때 그의 초상화도 추악하고 흉한 얼굴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도리안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 바질을 죽이고 초상화를 칼로 베어버렸지만 죽은 것은 도리안이었다. 초상화는 바질이 처음 그렸을 때의 모습으로 그대로 있었다. 도리안이 자신의 칼로 자신의 영혼을 찔러 죽였다는 조금은 황당한 비기독교적 이야기를 와일드는 펼쳐보인 셈이다.

▨… 누가 무엇이라고 논리를 전개해도 도플갱어 현상은 정신분석학 영역이고 비기독교적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그림자가 없어진다는 이야기 만큼 황당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황당함에 마주 서보자. 세모에 서서 한해를 돌아보자. 살아온 날들의 덧없음과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회한으로 삭풍이 흐르는 구멍뚫린 가슴을 감출 수 없었던 ‘지난 해의 나’가 올해의 세모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 실과를 구하되 3년을 헛걸음한 포도원 주인이 마침내 진노하였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금년에는 그대로 두소서”(눅 13:8)라고 간청하였다. 세모에 선 자 뉘라서 이 간청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가. 3년이나 꼭 같은 말을 내뱉는 나, 나, 나 셋이 그곳에 함께 서 있지 않은가. 부정하고 싶어도 우리는 도플갱어 현상에 갇혀 있다. “주인이여,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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