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성 목사
196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아폴로 8호 우주선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달의 궤도 진입에 성공하였습니다. 우주비행사 3 명을 실은 유인 아폴로가 달의 궤도를 비행하던 그 날 저녁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은 달 표면 71마일 상공에서 지구로 보내오는 전파를 듣기 위해 TV와 라디오에 귀를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폴로 8호 승무원들이 지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보내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곧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는 말씀이 흘러 나왔습니다.

우주비행사들이 번갈아 가며 성경의 창세기의 말씀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구에 있는 60억 인구에게 우주에서 특별히 보낼 메시지로 성경의 말씀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머나먼 우주에서 작은 지구를 바라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한 마디는 그들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 앞에 자신의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네 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의 신앙입니다. 창조신앙은 신앙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창조를 믿지 못하면 신앙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창조신앙은 신앙생활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하는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 입니다. 이 가운데 임마누엘은 가장 현재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는 믿음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설명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장엄한 선포로 시작됩니다. 천지는 우연의 산물이거나 무의식적인 힘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임을 근원적으로 선포합니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시대의 인물이므로 창세기를 기록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딤후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창세기를 기록하였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주어로 등장하시는 곳이 28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창조사역을 감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아름다운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될 때 세상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하나님을 주어로 모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세계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수면밖에서 빙빙 돌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 들어가시지 못하지만 독수리가 알을 품듯이 인간을 품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창조의 역사는 지금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지금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악 된 인간의 힘으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개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성도들에게 잘 읽혀지지 않는 책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끝내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창조는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인간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창조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창조적이거나 창의성이라고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은 창조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도 진화론자의 얘기처럼 무생물에서 생물로, 바이러스에서 박테리아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유인원에서 사람으로 진화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던 재료를 모으고 조합해서 이 세상을 만드신 게 아니라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이고 그 외의 적들을 만든다는 말은 ‘아사’입니다. ‘바라’입니다.

사 43장 19~20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창조의 역사가 지금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첫째 날에 빛을 만드셨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있기 전 상태를 “땅은 혼돈스럽고 공허했으며 암흑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흑암과 공허함과 혼돈을 제거하시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창조가 빛의 존재를 통해서만 시작할 수 있고 또한 빛과 함께 창조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빛과 함께 생명이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에서 빛은 태양에서 오지 않습니다. 해로부터 빛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 해가 빛이 창조된 후에 만들어 졌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창1:16에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창조 4일째 일어난 일입니다. 빛이 만들어 진 후 3일이나 지나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 만드신 빛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빛과 다른 것입니다. 이 빛은 태양 같은 발광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빛이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빛을 만들어 내는 물체도 없습니다. 그냥 빛입니다. 즉 빛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빛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빛이라는 정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순간에 생겨난 것입니다.

요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이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 말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바로 하나님이시며 태초에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었으며 이 말씀은 육신 즉 인간의 형상 즉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고 그 분 안에 인간의 빛이 되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이 새해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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