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표] 배선표는 1905년에 세례를 받았다. 배선표는 어머니와 형, 조카와 함께 연동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했다. 배선표는 연동교회 관리집사로 사역했다.

그는 다석 류영모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류영모는 기독교인으로 동서고금의 철학사상과 유교와 불교를 두루 탐구해 진리를 꿰뚫은 당대의 명사였다. 배선표가 1900년대에 류영모를 연동교회로 인도했다. ‘연동교회 120년사’에는 “배선표는 인품이 훌륭하고 교회 일을 도맡아하는 청지기로 밖으로도 소문이 났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동경성서학원 재학 중 연동교회가 세운 묘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그의 아내 박기반은 동경성서학원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성결교회 최초의 전도부인이다. 배선표는 아내 박기반의 권고로 성결교회로 교적을 옮긴 후 철원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1917년 동두천 복음전도관을 개척했다.

1930년 목사안수를 받고 무교정전도관의 주임목사로 파송 받아 최초의 장로를 세우고 동양선교회의 보조를 벗어나 첫 번째로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다. 장년주일학교와 부인회의 활동이 뛰어난 교회가 되어 성결교회의 좋은 모습을 갖췄다.

[박용희] 1900년에 연동교회에 입교해 1908년 37세에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게일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연동교회 조사로 사역했으며 1908년 복음전도관으로 이명한 후 곧바로 유학을 떠나 동경성서학원에서 3년 동안 신학의 과정을 마치고 1911년에 귀국하였다. 하지만 그는 장로교회의 최용국과 원세성 등의 권유로 연동교회 지교회인 왕십리교회에서 이명헌의 뒤를 이어 조사로 시무했다.

또한 원세성과 함께 용인군 외사면 장평리교회(현 율리교회)의 부흥에 기여했다. 장평리교회는 연동교회 교인 최용주 최한주 박용희 원세성이 협심동력해 일제의 강제합방 이후 농촌전도 및 계몽운동을 위해 순방 중에 설립된 교회다.  

박용희는 연동교회 내 독립운동의 연락책이었다. 1921년 8월 31일 이상재 윤치호 박승봉 유성준 박용희 전필순 등 유력한 평신도들이 중심이 돼 기독교출판기관인 가칭 주식회사 창문사의 기성회조직에 참여하여 창문사의 설립에도 기여했다. 김상준 목사는 창립을 위한 재정모금에 크게 기였했으며 1930년 직후 창문사의 주간을 지난 바 있다.

또한 박용희는 적극신앙단에도 참여했다. 적극신앙단은 YMCA 총무 신흥우의 선도로 조직된 민주주의 초교파 단체로서 연동교회의 함태영 전필순 권영식 박용희 이석진 등이 깊이 관여했으며 193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한국교회 보수주의 교권주의적인 경향과 선교사들의 우월감 내지는 근본주의 신앙에서 탈피하고자 1932년 6월에 발족했다.  

그는 신사참배운동을 반대하다가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에는 과도정부 입법위원 기독교신민회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다. 1953년 예수교장로회에서 기독교장로건국훈장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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