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 목사
여러 해 전이다. 김천에 가려고 대구가 종착역인 누리호를 탔다. 차에 오르자 이내 잠이 들었다가 타고 내리는 발자국 소리에 슬며시 깼다. 어딘가 싶어 살폈더니 수원역이다.

30대 초반의 여성이 가까이와 “자리를 잘못 앉으셨네요.”라며 내어 주기를 바랐다. 깜짝 놀라 승차권을 꺼내 확인했다. 4호실에 타야 할 것을 3호실에 앉아 있었다. 뒷칸으로 옮겨 7D자리를 찾아 앉고 다시 잠이 들었다가 타고 내리는 소란스러움에 깼다. 평택역이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옆에 와 “제자리 같은데요.”라고 했다. 수원역에서 자리를 내어주고 3호실 뒤편에 4호실이 있을 것이란 짐작만으로 호실을 확인 안하고 옮겨간 게 실수였다. 내가 내 정신인가 싶고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4호실은 3호실 앞부분에 있었다. 비어있어야 할 내 좌석엔 20대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비로소 내 자리를 찾았다는 안도의 마음을 갖게 된 내게 “뒷자리가 제 자리인데요 바꿔 앉으시면 안 될까요?” 그들이 양해를 구했다.

김천역에 내려 병원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영안실 빈소에 들어서면서 제일먼저 영정에 시선이 갔다. 비교적 건강해 보이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친구가 나를 반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그가 투병 중 힘들고 외로워 할 때 좀 더 따뜻하게 다가가지 못했음이 미안했다. 그리고 두어 번 부질없이 지껄였던 말들이 후회스러웠다.

“이 사람아! 자네는 아내에게 큰 절 해야 하네.”

내가 그렇게 말할 때면 친구는 표정 없는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그는 십 수 년을 고혈압과 당뇨로 고생했다. 그 후유증으로 시력도 보행도 자유롭지 않아 아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야 했다. 내 딴에는 친구 아내의 수고를 격려하려는 단순한 생각으로 했던 말들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사려가 부족했다.

눈썹 하나도 짐이 되었을 노약한 아내에게 힘겨운 짐 덩어리로 얹혀서 버티던 그 친구, 정신적 부담인들 얼마나 컸을까. 그가 운명하기 전에 “여보! 고맙고 미안해. 당신의 보살핌, 하늘나라 가서도 잊지 않을 거야.” 이런 감사의 말이라도 전하고 떠났는지가 궁금했다.

영정 앞에 머리 숙여 예를 갖춘 후 친구에게 은밀히 말했다.

“자네 정말 잘 갔네. 이제 세상의 온갖 시름 내려놓고 편히 쉬게.”

진심어린 속말을 전하면서 열차 안에서 자리를 못 찾고 허둥대던 내 모습과 친구 영정의 모습이 겹쳤다. 겨우 찾은 자리마저 양보하고 남의 자리로 이리저리 떠돌다가 목적지에 내리게 된 것이 우연한 해프닝으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평택역에서 김천까지 가도록 잠이 오지 않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뭉게구름이 넘실넘실 내 쪽을 향해 밀려들고 있음이 보였다. 그 구름과 함께 지나간 세월이 살포시 가슴으로 스며들며 그 동안 내가 앉았던 수많은 자리들이 떠올랐다. 

아들의 자리. 남편의 자리, 아버지의 자리, 형제의 자리, 친구의 자리, 국민의 자리, 그리고 성직의 자리까지, 그 많은 자리 중에 가볍고 수월한 자리는 없었다. 가장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건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못했던 성직의 자리다. 열차 안에서 남의 자리로만 빙빙 돌다가 목적지에 내린 것처럼 내게 맡겨진 어느 자리 하나 충실히 감당하지 못한 채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이 온 지금,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

새해가 밝아왔다. 이 한 해, 영성과 건강을 키우고 마음 밭엔 사랑의 꽃을 가꾸면서 주어진 내 자리를 최선을 다해 지킬 것을 또 한 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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