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성] - 원세성은 1908년 51세에 48세인 그의 아내 남궁경신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의 직업은 정빈과 같은 전도인이었고 그의 아내 남궁경신도 전도인이었다.

원세성은 박용희와 함께 한일합방 후 농촌전도 및 계몽운동을 위해 안성, 진위, 용인, 죽산, 양성 등지를 전도구역으로 삼고 순방 중에 1911년 용인군 외사면 장평리에 장평교회를 설립했다.

1909년 정신소학교·정신남소학교교감으로도 일했다. 그는 1918년 장로가 되었고 1919년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발탁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시대 광무황제의 종2품 관직을 지냈고 황국협회의 중직을 맡기도 했다.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으로 돌아온 원세성은 설득력 있는 간결한 설교로 장로교회와 성결교회에서 전도 강연 및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22년 성결교회에 이명하여 경성성서학원 학생감으로 취임했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24년 총회본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양반 유학자들의 집단주거지에 체부동전도관(구 체부동교회, 현 영광교회)을 설립했다.

전도 집회를 열고 낮에는 축호전도와 개인전도로 밤에는 등불을 들고 북을 치고 나팔 불며 널리 광고하여 결신자 100여 명을 얻었다. 또 유년부흥회를 개최하여 매일밤 350여 명의 양반자제들이 모여 은혜 받고 통회 자복하는 심력들이 많았다.

경복궁 관청가에 자리한 체부동전도관에서는 유교사상과 양반행세로 교만한 사람들이 조선의 고관출신 원세성을 통해 완고한 심령을 무너뜨리고 구원을 얻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원세성은 1927년에는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교역자회의 회장이 되어 활동했다.  

[박제원] - 박제원은 1884년 5월 6일 충북 청원군 사주면 분평리에서 출생하여 신학문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상경했다. 의지할 곳 없는 청년 박제원은 1905년 21살 때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동교회에 입교하여 이듬해 세례를 받고 곧 집사의 직분까지 받았다.

그는 여기서 이명헌을 비롯한 좋은 신앙의 동지를 만났다. 이들은 함께 연동교회를 섬기며 민족의 장래가 오직 기독교에 있음을 확신하고 성경연구와 진리탐구에 정진했다.

박제원은 1908년 김상준 전도사의 노방전도 설교에 이끌려 들어간 전도관에서 성경강의와 체험적신앙의 간증에 죄를 회개하고 거듭남과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고 이명헌 등과 함께 연동장로교회에서 복음전도관으로 전적했다.

1911년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13년 7월 2학년 재학 중에 충남 부여군 규암으로 내려가서 규암복음전도관을 개척했다. 규암전도관은 조선의 중부 이남에 최초로 설립된 복음전도관이다.

또 그는 은산·홍산·금천리·석동리·강경·대전 등지에 성결운동의 기지인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성결운동이 지방으로 번지게 되었다. 박제원은 이어서 1914년에는 김천복음전도관을 1915년에는 경주복음전도관을 설립했다.

또한 1918년에 동래복음전도관과 부산복음전도관(현 수정교회)을 연이어 개척했다. 그는 영남지역 성결운동의 전진기지인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여 급진적 성결운동을 지역으로 확장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박제원은 1920년에 이명헌의 뒤를 이어 무교정복음전도관의 주임교역자로 부임하여 사역하던 중 1921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그 이듬해인 1922년에 복음전도관을 떠나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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