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 가장 먼저 뿌려진 ‘인천 복음의 길’

골목은 사람들의 삶의 숨결이 묻어나는 삶의 현장이자, 그 지역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는 보고(寶庫)이다.

인천 개항장 길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인천상륙작전 등 근대의 역사가 소용돌이쳤던 곳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역사가 첫 발을 들여 놓은 특별한 골목길이기도 하다.

 초기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앗을 심어서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은 길이다. 골목길 구석구석에 선교사들이 뿌려 놓은 기독교 정신이 배여 있고, 지금도 그 숭고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나라 첫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웨슬리 채플, 근대식 교육기관 영화학당, 성공회 내동교회 등이 있는 산책로들이다. 복음의 황무지에 뿌려진 땀과 눈물을 기억하며 그 길을 함께 걸어보자.

▲ 우리나라 최초 감리교회 내리교회(왼쪽 사진), 인천 최초의 서구식 예배당 웨슬리채플(오른쪽 위 사진 ), 아펜젤러 선교사와 존스 선교사, 김기범 목사의 흉상(오른쪽 아래 사진)

인천개항장 평화길
인천도호부 북서쪽 약 8킬로미터 지점 바닷가에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지휘관으로 두고 지키게 했다. 제물량영(濟物梁營) 또는 제물진(濟物鎭)이라 불렀다. 병자호란 때 한양에서 통진을 거쳐 강화로 피난하던 길이 막혔다. 하는 수 없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돌렸다. 전쟁이 끝난 뒤 효종 7년 1656년 제물진을 강화 동쪽으로 옮겼다(‘新增東國輿地勝覽’). 새로운 피난길을 만들면서 제물진을 폐하고 강화로 이전한 것이다. 이때부터 개항할 때까지 작은 포구 제물포(濟物浦)로 남았다.

1875년 1월 부산에 운양·춘일·제2정묘 등 일본 군함 세척이 나타난다. 8월에는 맹춘·고웅 등 군함 두 척이 더 합세하여 강화에 나타난다.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도에 상륙하여 분탕질을 자행한다. 1876년 2월 강화 연경당에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는다. 조선은 개항한다. 1883년 1월 부산과 원산에 이어서 세 번째로 제물포를 개항한다. 인천이라 고쳐 부른다(‘개항도시 제물포’).

일본조계·청국조계·각국조계를 설정한다. 청국군대와 일본군대가 제물포로 들어온다. 청일전쟁이다. 10년 만에 러시아군대와 일본군대가 또 다시 제물포에서 싸운다. 러일전쟁이다. 일제가 쫓겨난 제물포에 인민군이 들어온다. 한국전쟁이다. 닷새 동안 폭격을 멈추지 않았던 미군과 한국군이 들어 온 것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다. 포성은 멈췄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인천개항장에서 평화를 생각한다. 역설적인 평화길 인천개항장을 걷는다.

인천 평화의 순례길 지도
내리교회·첫 감리교회
1호선 전철 동인천역에 내린다. 1번 출구를 돌아 나와서 3번 출구 앞 건널목을 건너서 동인천역을 등지고 곧장 걷는다. 5분가량 걸어 오르면 오른쪽 언덕 위에 빨강벽돌로 지은 감리교회 ‘내리교회’가 서 있다.

1847년 펜실베이니아 출신 로버트 맥클레이(Robert Maclay, 1824~1907) 목사는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들어간다. 25년 뒤 1873년 일본으로 자리를 옮긴다. 187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설립한다. 딕킨슨대학 선배 존 가우처(John Goucher, 1845~1922) 목사가 보내 준 거액으로 세운 명문대학이다.

 1882년 고균  김옥균(古均 金玉均, 1851~1894)이 인솔해서 일본으로 유학 간 학생들은 매클레이 부부에게 영어를 배운다. 1883년 보빙사로 미국에 간 운미 민영익(芸眉 閔泳翊, 1860~1914)은 미국 대통령을 알현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가우처 목사를 만난다. 아더(Chester Arthur, 1829~1886) 대통령을 알현한 뒤 볼티모어로 가서 다시 가우처 목사를 만난다.

인천항과 전동을 연결하는 홍예문
가우처 목사의 요청에 따라 미국 감리교회 총회선교위원회는 조선선교를 결의한다. 조선 선교비 5,000 달러를 책정하고 그 중 2,000 달러는 가우처 목사 특별헌금으로 충당한다. 1884년 6월 23일 제물포에 내린 첫 방한선교사 맥클레이는 이튿날 한양에 들어간다. 1884년 7월 2일 고균 김옥균은 맥클레이 목사의 선교의향서를 고종에게 전달한다. 7월 3일 고종은 전신 부설과 미국 상선 조선바다 항행 그리고 병원과 학교 설립을 윤허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부부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아펜젤러 부부는 대불호텔에 여장을 푼다. 언더우드는 잠시 쉬었다가 바로 한양에 있는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에게로 향한다. 6월 20일 제물포에 재입항한 아펜젤러는 인천개항장 언덕 위 초가집을 빌려서 생활한다.

7월 29일 한양으로 거처를 옮긴 때까지 39일간 머물렀다. 조선 그리스도인들이 아펜젤러가 떠난 자리에 내리교회를 세운다. 3.1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제9대 신홍식(申洪植, 1872~1937) 목사는 자신이 쓴 인천 내리교회 ‘敎會歷史’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一千八百八十五年에 本 敎會가 비로소 시작하였는데 美國 牧師 월능거(Ollinger)氏가 京城 貞洞에 住宅을 定하고 本敎를 巡察하며 조선교인 盧丙日 氏를 파송하여 傳道하였더라.”

인천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영화여학당.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송천리에 조선 최초 장로교회 소래교회를 세웠다.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에 조선 최초 감리교회 내리교회를 세운다. 노병일은 1890년 내리교회 첫 예배당을 조선집으로 지었다. 천주교회와 마찬가지로 개신교회도 조선 신자들이 시작했다.

1901년 아펜젤러는 조선집을 허물고 웨슬리예배당을 신축·완공한다. 1955년 9월 웨슬리예배당을 허물고 1958년 12월 22일 새 예배당을 완공한다. 1964년 2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교회당과 모든 역사유물들을 다 잃었다. 오늘날 내리교회를 건축한 것은 지난 1985년 12월. 1885년 4월에 시작한 내리교회는 1985년 12월 새 예배당을 짓고 100주년을 기념하고 오늘에 이른다.

성공회 내동성당 - 조선을 사랑한 약대인

인천성공회 내동교회.
내리교회와 웨슬리기념관 사이 길 자유공원로27번길을 올라간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왼쪽 벽돌담장길을 따라 감아 오르면 성공회 내동성당이다. 원래 성누가병원이 있었던 곳이다. 1904년 러일전쟁 서막을 열었던 제물포해전에서 부상자를 후송하여 치료한 병원이다.

1890년 9월 29일 의료선교사 랜디스(Elis Barr Landis, 1865~1898)는 코프 주교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1891년 10월 조선지계(朝鮮地界) 그러니까 조선인마을에 ‘선행을 베풀어 기쁨을 누리는 병원’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을 완공하고 본격적인 진료에 들어간다. 현재 내동성당이 있는 자리다. 대부분 조선환자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진료비와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랜디스는 모든 관심을 조선 그리고 조선사람에 기울였다. 제물포 사람들은 랜디스를 ‘약대인(藥大人)’이라 불렀고, 병원이 자리한 언덕을 약대인 산이라 불렀다. 제물포 사람들이 랜디스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1892년 이래로 조선고아학교를 개설해서 가르치는 한편 조선 고아 중 한 명을 입양해서 키운다. 같이 생활하는 고아 숫자는 순식간에 다섯으로 불었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메노나이트의 신앙을 실천한 것이다.(The Korean Reposi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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