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성훈 목사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백성을 출애굽시키라는 소명을 주십니다.

이 때 모세가 보였던 반응은 (출 3:11) 『…내가 누구이기에(히. 미 아노키)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였습니다. 히브리어 ‘미 아노키’를 번역한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말은 상당히 잘된 의역입니다. ‘미’는 ‘누구’란 뜻을 나타내는 말이고 ‘아노키’는 ‘아니’와 동일한 용어로서 ‘나’를 의미합니다. 직역하자면 “내가 누구입니까?”입니다.

이는 일종의 반어법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로서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하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국어 성경에서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한 번역은 뉴앙스를 매우 잘 살린 의역입니다. “내가 뭐라고 그 일을 한단 말입니까”라는 뉴앙스를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출 3:12)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는 답변이 자칫 “괜찮다. 모세야. 이해한단다. 네가 지금은 그렇게 지내고 있지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에게 능력을 줄 것이다”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의미가 없지는 않으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과도 직결됩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에히예 임하’를 번역한 말입니다. ‘에히예’의 뜻은 ‘내가 ~일 것이다’ 혹은 ‘내가 존재할 것이다’ 이며, ‘임하’는 ‘너와 함께’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에히예’라고 하는 말이 그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자 하나님은 ‘내가 스스로 있는자’ 즉 히브리어로 ‘에히예 쉐에이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인 ‘내가 스스로 있는자’란 말은 ‘내가 ~하리라’ 혹은 ‘내가 ~일 것이다’란 말을 두 번 반복된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은 단순히 “모세에게 능력을 주시고, 바로로부터 보호하시고 그를 인도하시겠다”란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그 차원을 훨씬 더 넘어섭니다.

이 말은 “모세야! 너와는 상관이 없이 출애굽 구원의 일을 전적으로 내가 이룰 것이란다”는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 말이 맞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자이셨습니다. 당연히 모세 없이도 하나님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단지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 인간에게 집중되어 있는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온 세상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그 사랑이 크고 놀라운지 인간 세계에 오셔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란 말씀으로 계시지 않고, 이제는 육신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사랑의 극치가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이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야 말로 복음중의 복음이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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