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결교회 태동의 선한 이웃 연동장로교회

연동교회에서 이명해온 인사들은 이전에 소개된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장의 이동은 곧 가족 모두의 이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연동교회에서 이명해온 교인들 가운데 이명직 약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사들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이완순 같은 경우가 그 예다. 그는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완순은 연동교회출신 박제원이 1915년에 개척한 경주복음전도관의 두 번째 목회자였다. 그의 뒤를 이어 어려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의 태동기인 1907년 당시 연동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교인들이 모였다. 국권을 잃고 나라의 독립을 꿈꾸는 지도자들과 다양한 분야의 유능한 인사들이 모인 교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08년부터 2년여 동안 계속된 교회 내의 갈등과 분열은 연동교회 역사상 가장 마음아픈 사건이었다.

그러나 연동교회 교인 다수가 구리개복음전도관으로 이명해온 것은 복음전도관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고 한국성결교회를 태동시키는 일에 선한 이웃이 되었다. 1907년 5월 이후 1919년까지 세워진 20개의 복음전도관 가운데 연동교회출신 목회자들에 의해 개척된 복음전도관이 전체의 절반인 10여 개에 이른다.

무교정복음전도관(1907년 정빈 김상준) 규암복음전도관(1913년 박제원), 철원복음전도관(1914년 배선표), 김천복음전도관(1914년 박제원) 경주복음전도관(1915년 박제원), 동두천복음전도관(1917년 박제원), 안성복음전도관(1917년 정빈), 동래복음전도관(1918년 박제원) 부산복음전도관(현 수정교회 1918년 박제원) 인천복음전도관(1919년 정빈)이다. 또한 정빈 이명헌 원세성 등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 및 학생감 역할을 했으며 다른 인사들도 주요 복음전도관의 주임 및 부임목회자로 사역했다.

이처럼 구리개복음전도관으로 다수의 연동교회 교인들이 이거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성결교회와 연동교회는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이것은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교회내부의 갈등의 현상 가운데 명분 있는 이명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복음전도관은 교파주의를 표방하지 않았고 복음적이기 때문이다.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은 교파를 만들 목적이 없었다. 이러한 정신은 복음전도관시대에 계속되었다. 

당시 복음전도관의 사역이 교파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오직 전도에만 열심이었기 때문에 한국장로교회와 감리교 등 타교파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예를 들면 1921년 5월29일부터 6월14일까지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고 동양선교회가 주관해서 복음전도관의 강사들이 두 주간 밤마다 매일 서울의 대표적인교회인 무교정전도관, 석교교회, 종교교회, 하교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묘동교회, 연동교회, 청령교교회, 수표교회를 순방하며 복음전도를 진행했다. 

이것은 연동교회 설립초기부터 전도인으로 사역하다가 이명해 온 정빈의 존재와 연동교회에서 이명한 인물들이 신실함 때문이다. 또한 선교사가 목회하는 연동교회의 수용성으로 판단된다. 구리개복음전도관으로 연동교회교인들이 이명해온 일은 교회의 부흥을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연동교회와의 연결은 당시 주요교회와 다양한 분야의 지도급인사들과의 연결이 있었다.

그 결과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보다 30여 년이나 늦게 선교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관은 1915년 조선공진회박람회 기간 중 50일 동안 진행된 연합전도회 같은 교파연합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3대 주요교파 명단에 ‘성결교회’라는 이름이 들어가게 되는 하나의 디딤돌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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