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구에 회자되는 유머 하나. 천국의 문지기 베드로를 대신해서 예수께서 문을 지키고 있었다. 낯익은 노인이 그 앞에 다가왔다. 예수께서 이름을 물었다. “요셉입니다.” “직업은?” “목수 일을 했습니다.” 예수께선 조금 흥분되어 물었다. “아들이 하나 있죠? 팔목과 발에 못자국이 있는…” “그렇습니다만…” 예수께선 눈물을 글썽이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아버지!” 노인은 의아해하더니 물었다. “피노키오냐?”

▨… 이 유머는 카를로 콜로디의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나무인형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의 이름 주세페는 요셉의 이탈리아식 발음이고 피노키오와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있으며 피노키오는 여우와 고양이에 의해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 그러나 피노키오를 사랑하는 독자들의 항의로 콜로디는 피노키오를 다시 살려냈다.(나무위키, ‘피노키오’ 참조)

▨… 제페토는 먹기 살기조차 고단한 삶 속에서 자신이 조각한 목각인형만은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피노키오는 제페토의 바람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자신을 만들어 준 제페토에 대한 존경심도 전혀 없었다. 제멋대로인 피노키오는 마침내 고래에게 삼켜져 버렸다. 그런 피노키오를 살려낸 것은 제페토였고 그 제페토의 진심 때문에 피노키오는 진짜 살과 피를 갖춘 아이로 변해갔다.

▨… 피노키오적인 모험에 아이들이 모두 유혹당한 탓일까. 교회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교단에서도 교회학교가 사라져버린 교회가 거의 태반에 이른다고 한다. 아무리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고 아이들의 관심이 모바일이나 컴퓨터에 쏠려 있다 하더라도 담임목회자들이 제페토의 진심으로 교육현장을 붙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제페토를 무시하던 피노키오도 제페토의 진심을 알고는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지 아니하였는가.

▨… 일리히(Ivan Illich)는 “학습자가 무엇을 또 어떻게 배우는가를 자유로이 선택할 때 사회적으로 값있는 배움이 형성될 수 있다”(J.L.엘리아스, ‘의식화와 탈학교화’)고 진단했다. 교회교육의 공동화 현상을 아이들이 피노키오적 모험에 유혹 당하는 탓이라고 핑계대서는 안된다. 우리의 교회학교교육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쇠침대’처럼 아이들에게 강제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더늦기 전에 점검해야 한다. 교회학교 교육현장에서 제페토의 진심을 살려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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