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믿음으로 행복 꽃 피워”
아이 둘 딸린 오세현 목사와 만나 현실의 벽 함께 넘어

▲ 양금숙 사모는 아이가 둘 딸린 오세현 목사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네 아이를 키우며, 오 목사의 가정을 돌봤다. 또 가난한 농촌 개척교회의 사모로 모고히 사역을 돕고 섬김을 실천해왔다.
해맑은 웃음이 아름다운 양금숙 사모(대명교회)는 날개 없는 ‘천사’로 통한다. 아이 둘 딸린 가난한 목회자에게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전처가 낳은 자식까지 키웠다. 그리고 쌍둥이 아들과 딸까지 낳아 가정에 새로운 행복도 안겨주었다. 남편 오세현 목사가 없을 때는 설교며 심방 등 웬만한 교회 사역을 혼자서 척척 해낸다. 집 근처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교사 일까지는 하는 그녀는 작은 체구에서 그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집 안 일에 남편 내조, 교회 사역까지 1인 3역을 거뜬히 해낸다. 이런 그녀와 결혼한 오 목사는 천사 같은 아내 덕분에 언제나 신나 종일 일을 해도 힘이 하나도 들지 않고 웃음만 나온다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까지는 험난한 준령이 많았다. 부모와 형제에게 외면 받으며 축복받지 못한 눈물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맺어준 사랑이기에 그 사랑에 책임을 지기 위해 이들의 사랑은 가시밭길에서 시작되었다.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
양 사모는 꿈 많은 청년이었다. 1988년 대학을 졸업한 후 경기도 여주에 있는 유치원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다. 모든 것이 설렐 때 그곳에서 예쁜 어린 두 자매를 만났다. 그들은 오세현 전도사의 딸이었다.

당시 이단에 빠진 아내에게 버림을 받은 오 전도사는 매형과 누나가 사역하고 있는 운암교회에 아이들을 맡겼다. 어려서부터 작은 시골교회에서 봉사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마침 유치원 인근에 있는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유난히 아이들과도 가까워졌다. 엄마처럼 아이들을 씻겨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엄마 없는 두 아이도 “선생님이 우리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초년생 유치원 선생님과 아이들이 정을 나누고 있을 때, 유치원 교사와 학부모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아이 둘 딸린 아버지로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오 전도사는 이상하게 유치원 선생님을 만날 때, 가슴이 뛰었다. 그녀도 키도 훤칠하고 싹싹한 아이들의 아빠가 왠지 싫지 않았다.

운암교회에서도 함께 사역한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20대 처녀가 아이가 있는 홀아비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현실에서 이해받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고 있었지만 사랑의 벽은 높았다. 두 사람은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도덕과 윤리에 갇혀 내가 너를 예비해 놓은 사람을 거부하지 말라’는 기도응답이 왔다. 이후 오 전도사가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양 사모의 마음도 열려 2년간의 연애를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갑자기 그의 곁을 떠났다. 용인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당시 대명교회를 개척했던 오 목사는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 매주 사랑이 담긴 택배를 보내고, 편지를 쓰고, 매일 30분이 넘게 공중전화로 달려가는 수고를 하면서까지도 통화를 하는 등 그녀에게 끝없는 애정공세를 펼쳤다. 그럼에도 헤어짐과 만남의 반복은 7년 간 계속됐다.

좀처럼 끊을 수 없는 인연에 양 사모는 “사랑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며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평생 혼자 살아도 좋으니 가까이서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끝에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오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고, 전처의 문제가 해소되는 등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힘든 기도가 이뤄진 것이다.

가족들 핍박 받으며 어렵게 결혼
하지만 결혼식 당일도 순탄치 않았다. 식장에 입장하기 직전, 양 사모의 친언니와 오빠, 남동생이 찾아와 ‘결혼을 하려면 가족과 연을 끊겠다는 혈서를 작성하라’는 요구를 해 양 사모는 혈서를 쓰고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행복할 것만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양 사모는 일평생 아파트에 살다가 결혼을 하고 추운 시골집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 했다.

또 오 목사의 사역이 남달랐기에 알콜 중독자, 아들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던 권사님, 도벽증이 심해 마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아이까지 그가 데리고 오는 사람마다 내 아이처럼, 내 가족처럼 품어야 했다. 양 사모는 오 목사를 내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 없는 자, 외로운 자, 소외된 자들을 돌봐야 했다.

그러나 양 사모는 그저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이 감사했다. 이 역시도 본인이 고등학교 시절 ‘사모가 되겠다’는 기도를 한 것과 사모가 됐기에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의 은혜로 친정 가족들과의 관계도 회복돼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고 오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 등 놀라운 역사도 일어났다.

차량봉사·예배 인도 등 부교역자 역할
사모의 역할만하기도 어려운데 30여 년 째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는 양금숙 사모는 오 목사를 돕는 사역에 늘 발 벗고 나선다. 현재 부교역자를 두지 않고 1인 목회를 하는 오세현 목사를 돕다보면 양 사모는 안하는 일이 없다. 주일학교 교사부터 시작해 성가대 지휘, 차량봉사, 심지어 오 목사가 외부 사역을 하는 날이면 수요예배 설교도 맡아서 한다. 그야말로 전천후 동역자다. 

교회 행사가 있는데 유치원 일 때문에 바빠서 돕지 못할 경우 직접 사비로 성도들의 선물을 사서 수고를 격려하기도 한다. 본인이 동행할 시에는 꼭 나서서 성도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교회 재정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양 사모는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 위함”이라며 아낌없이 쓴다.

월급 외에 성과금 같은 예상 밖의 수입이 생길 때면 주변에 어려운 교회를 돕는다던지 지역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오 목사와 이심전심, 전적으로 신뢰
오세현 목사가 하는 모든 일에 ‘잘했다’라고 칭찬하며 그의 목회활동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도 양 사모의 중요한 역할이다. 오 목사가 상황에 맞게 주시는 성령의 감동에 순종해 양 사모와 의논할 새도 없이 이웃교회에 헌금을 하고 주민들을 위해 헌신할 때에도 양 사모는 따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계산적인 생각에 ‘왜 그랬냐’고 오 목사를 다그친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오 목사가 믿음으로 결단할 때, 칭찬해주고 전적으로 신뢰해 주는 것이 오 목사의 사역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세현 목사는 “아내는 늘 감사하고 긍정적이다. 함께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나에게 왜 보내주신지 알게 됐다”며 “항상 나를 존중해주고 이해해주기에 내가 더욱 힘 있게 목회를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양금숙 사모는 “살면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을 만난 이후로 어려웠던 모든 일들이 해결됐다.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이라며 “부족하지만 내가 사모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고백했다.

드라마 같은 만남 끝에 맺은 사랑의 결실 때문일까. 양금숙 사모와 오세현 목사는 세 명의 자녀를 둔 부부이지만 아직도 신혼부부처럼 사랑이 넘친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양금숙 사모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노력에 오늘도 오세현 목사는 든든히 목회에 전념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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